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형법 제정 이후 66년 만에 지속되어 온 ‘낙태죄’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인 날이죠. 불과 7년 전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던 헌법재판소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허구적인 대립 구도를 깨뜨리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 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고 낙태를 감소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등 사전적, 사후적 조치를 종합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실효성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헌법재판소의 극적인 입장 변화는 격동하는 사회에 발맞추어 성장한 여성주의와 성숙한 시민의식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해 봅시다. 피임을 해왔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임신으로 고민한 당신이 임신중지라는 결정을 내리고 병원을 찾습니다. 의사는 당신의 판단을 믿고 우선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진을 하고 초음파를 권합니다. 확인 결과 현재 임신 6주라고 말해줍니다. 이제 약물과 시술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를 상담합니다. 시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당신은 조금 오래 걸리긴 하지만 자연유산과 유사한 증상으로 진행되는 약물을 이용하기로 선택했고, 이후 자세한 복용방법과 예상되는 경과, 언제 병원에 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당신의 파트너나 가족은 당신의 결정을 지지해 주고, 약물을 복용하고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곁에서 지켜줍니다. 유산이 되고 나서 다시 찾아온 병원에서는 이후 건강관리와 피임법 등에 대한 상담을 합니다.

이런 의료서비스를 모두가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으려면 내년 말까지 입법과 정책을 준비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어떻게 입법으로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권이 매우 달라지는데요. 이미 임신중지가 합법화된 국가들에서 그렇듯이, 임신 초기 몇 주까지만 혹은 태아의 이상이나 사회경제적인 사유 등 특정 사유에 한해서만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식으로 법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해당 사유를 입증하기 위한 서류 혹은 절차들을 따르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야 합니다. 혹은 임신중지를 결정하기 전에 자격 있는 상담사와의 상담을 몇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거나, 의사를 만나 임신을 확인하고 나서도 임신중지를 시행할 때까지 당신이 ‘숙려’할 시간을 며칠 동안 가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사들은 종교적이거나 개인적 신념을 이유로 임신중지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법적인 성년이 아니거나 정신장애를 가진 경우라면 이 모든 권리가 당신의 뜻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부모 혹은 법적 보호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임신중지에 제한을 두려는 논의가 지속되는 이유는, 안전한 임신중지가 필수적인 의료서비스이자 인권이 아니라 여전히 제3자의 판단이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사항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임신중지가 다른 의료서비스와 다르게 취급되는 것은 결국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의료행위로서의 임신중지가 여성의 건강권을 위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판단을 하는 여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임신중지 접근성에 여러 장벽을 두는 폐해가 임신중지율을 낮추기는커녕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의 결과로 결국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은, ‘낙태죄’가 근대법으로 제정되기 시작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입증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난 수십 년간 국제기구 및 규약들은 안전한 임신중지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적인 임무임을 강조해왔습니다. 일례로 유엔 사회권위원회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과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의 예방은, 국가가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구매가능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피임 및 포괄적인 성교육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고, 제한적인 임신중지 관련법을 완화하고, 의료서비스 제공자 훈련 등을 통해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 및 양질의 임신중지 이후 건강에 대한 여성과 여아들의 접근을 보장하고, 여성들이 자신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릴 권리를 존중하는 법적 및 정책적 방안을 채택할 것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성과 재생산 건강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rights)’ 중에서도 ‘안전한 임신중지’는 건강권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결혼, 양육 및 가족구성에 관한 권리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안전한 임신중지라는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길 위에서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합니다. 현재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 입법과 정책을 만들어갈지 그 두 번째 발걸음의 방향이 다시 또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태(胎)를 떨어뜨린다’는 의미를 가진 ‘낙태(落胎)’라고 알려진 행위를 그동안 낙태죄폐지운동에서 사용되어온 ‘임신중지’라는 용어로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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