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10

잘 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법

사람들은 망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또 사람들은 슬픈 이야기를 좋아한다. 망해서 눈물 나는 이야기나 처절하게 망한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사람들은 헤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또 억울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길을 잃고 원통해 하는 이야기나 억울하게 길 위를 떠도는 이야기는 영원토록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그 네 가지 이야기가 뒤섞여 내내 울고 웃고 떠들고 신들린 주말이었다. 오래 사랑했던 한 시대를 접고, 다시 한참 사랑할 다른 무대를 세우는 시작이기도 했다. 

과학판 만드는 사람들, 우연히 여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5월 특강으로 흥미로운 자리를 만들었다. ‘기획자의 세계’라는 주제로 과학컨텐츠를 만드는 이들을 무대에 초대한 것. 연사들은 나와 최진영 <과학과사람들> 대표, 이미영 <과학책방갈다> 총괄 디렉터 세 사람이었다. 이강환 관장은 화면에 신문기사 하나를 크게 띄웠다. “이 기획은 지난 연말, <한겨레신문>을 보고 착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성 기획자의 세계’라는 제목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냥 과학 기획자들 중 가장 잘하는 분을 뽑아도 이 세 분보다 더 잘하는 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여성’을 뗐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박다해 기자의 기사 속에서 우리 세 사람이 웃고 있었다. 기사는 ‘무대가 없으면 무대를 세워 오르고, 마이크가 없으면 마이크를 사다 쥐는 과학계의 송은이 같은 여자들’ 컨셉트였다. 박 기자는 언론계 ‘페미기자’로 유명하다. 사회 각 영역에서 무대를 만들고 판을 바꾸는 여자들을 인터뷰해 시리즈 기사를 내고 있다. 이 관장이 박 기자의 크레딧을 챙겨주어 고마웠다. 사회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 

과학과사람들은 과학전문기획사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이나 카오스재단과 같은 공공기관이나 재단의 형태가 아닌 ‘회사’의 형태로 사업을 진행한다. 회당 최대 청취자 1백만을 찍는 유명 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로 널리 알려졌다. 팟캐스트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부터 6년 동안 독보적인 업계 1위. 정부와 과학 관련 기관이 발주하는 과학문화 사업을 대행하고 독자적인 과학 테마여행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충성고객들의 멤버십으로 인건비를 충당하는 구조가 가장 부러운 대목. ‘딴지일보’ 시절 주축이었던 ‘파토’ 원종우 대표가 1기 리더십을 맡아 팬덤을 세웠고, ‘최팀장’으로 알려졌던 최 대표가 2기 리더십을 통해 사업다각화와 내실화를 꾀하고 있다.

과학책방갈다는 지난해 봄, 천문학자 이명현 대표를 비롯해 과학 커뮤니케이터 120여 명이 주주로 참여한 과학전문기획사다. 역시 ‘회사’다. 이 대표가 자란 삼청동 옛날 집을 개조해 서점을 만들고, 오프라인 진지를 중심으로 북토크와 북클럽, 각종 강연과 과학사업을 기획한다. 공간이 깨끗하고 예뻐서 과학 출판사나 ‘아태물리재단’ 같은 과학 관련 단체들의 오프라인 행사 섭외 1순위로 꼽힌다. 천문학자인 이명현 대표의 전공 덕분에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의 아지트가 된지는 오래다. ‘칼 세이건 살롱’ ‘스티븐 호킹 살롱’ 같은 북클럽이 돌아가고, ‘SETI 한국위원회’ 같은 활동도 활발하다. 고급 갤러리와 요식업체, 키치적 한옥과 한복문화가 어지러이 들어선 삼청동 지도에 과학문화를 보태는 데도 한 몫 하고 있다. 과학문화 시장은 워낙 돈의 단위가 크지 않아, 요행히 나 역시 몇 명 안되는 최대 투자자 군에 속한다. 걸스로봇과 한국SF협회 공동으로 ‘페미숲SF갈다’라는 북클럽을 런칭해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걸스로봇과 제주과학문화공간 별곶이 있다. 워낙에 한 뼘 남짓한 한국 과학의 영토에서는 과학문화만 해도 불모지인데, 거기에 젠더운동까지 더하니, 이건 숫제 돈을 벌자는 일이 아니라 돈을 쓰자는 일. 게다가 나는 “돈에는 꼬리표가 달렸다”는 말을 신봉하는 편이어서 아래아한글 기획안 쓰고, 영수증 풀칠해야 하는 남의 돈을 무서워한다. 그러다 보니 정부사업은 피해 다니고, 기업 후원도 가려 받고, 죄 사비를 들이게 됐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글로는 여러 번 밝힌 바 있었다. 어쩌다 내가 첫 강연자로 나선 지난 주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강연에서는, 지난 4년 동안 얼마짜리 행사를 어떻게 기획해서 경제적으로는 얼마나 망하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흥했는지를 정리해 발표했다. 

거간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기획 작업의 숙명인 ‘거간’으로서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도 말했다. 기획자는 프로듀서로부터 로드 매니저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일을 한다. 무대를 세울 때는 설계자라도 된 듯 뿌듯하지만, 결국 남의 컨텐츠를 빌려와야 하는 거간으로서는 본질적인 한계에 맞닥뜨리게 된다. 스타 과학자와 과학 프로그램이 주인공이지, 우리가 주인공은 아닌 것이다. 거간의 역할은 자주 과소평가된다. 뼈를 갈아 넣어서까지 퀄리티를 유지하고, 돈 대신 크레딧을 챙기고, 스피커로서 스스로 말하는 자리에 자꾸 나서는 까닭은 그래서다. 우리는 더 많이 드러나야 하고, 더 가시화돼야 한다. 그래야 후배들이 설 자리가 생긴다. 과학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면서 과학판에 살고자 하는 존재들의 자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니 객석은 아수라장이 됐다. 무슨 마당놀이에서처럼 눈물, 웃음, 경악, 공감이 결합한 대환장쇼가 펼쳐진 게다. 다음 타자로 나설 기획자 언니들이 “난 저렇게까지 솔직하게는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을 정도. 개인 캐릭터의 차이도 있겠지만, 다른 두 회사들은 엄연히 주주가 있는 곳이고, 나는 몸 가벼운 개인회사여서 그렇게 숫자와 배경을 까발릴 수 있었던 거다.

객석의 질문 중에 그런 것이 있었다. 

“걸스로봇과 제주별곶 기획들이 강력하고 엣지있다고 생각하고 부러워했는데, 시장상황과 속사정을 알려주셔서 너무 놀랐어요. 저도 제주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할까 했는데 걱정입니다.” 

나의 답변은 이랬다. 

“네, 저희 일 잘하는 거 맞습니다. 기획력 최고고요, 추진력 강력합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요, 부동산 레버리지가 더 강력합니다. 저희 제주별곶도 그렇고, 삼청동 갈다도 그렇고요, 컨텐츠는 죽이는데, 그 컨텐츠가 부동산 오르는 걸 못 당해요. 부동산이 현재로선 가장 강력한 수익 모델이에요. 이 시장, 버티다 보면 저희가 이기는 시장은 맞는데, 그 때까지 버틸 돈이 있어야죠. 제가 쓴 SF를 넷플릭스에 파는 것이 빚을 갚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많이 팔아주세요.” 

객석에서 이미영 총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뒤풀이에 참석한 청중 한 분이 “빚까지 져 가며 좋은 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술을 샀다. 최진영 대표가 말했다. “사람들이 망한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어떻게 웃길까만 생각했는데, 기획 다시 해야겠다.” 다들 깔깔 웃었다. “막상 자산 까보면 우리가 제일 약할 걸요. 우린 부동산이 없어서 빚도 못 내.” 이번에는 마냥 웃지는 못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과학 컨텐츠 시장의 실상이었다. 그럼에도 소명이든, 재미든, 각각을 추동하는 무언가에 들려 멈추지 않고 이 일을 하는 거다. 

주말엔 SF 북토크가 이어졌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강연장에 오셨던 관객들이 몇 분 또 오셨다. 이번에는 컨텐츠의 노예에서 컨텐츠의 주인이 되고자 헤매는 이야기를 했다. 작법과 같은 형식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으면서 ‘야매’로 귀동냥해 다만 뭐라도 쓰고자 했다. 내 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을 기자로 일하며 기사도 쓰고, 인터뷰도 썼다. 기자를 그만두고는 칼럼도 쓰고, 에세이도 쓴다. 뭐가 뭔지 모를 잡문도 많이 썼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하고자 하는 궁극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처음부터 과학이 아니라 젠더가 더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젠더를 말하기 위해 과학이니 문화니 강연이니 인터뷰니 하는 플랫폼과 비히클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넷플릭스와 SF라는 세계로 건너가봤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만의 것을 팔고 싶다. 지금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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