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 임시정부 전경/사진제공=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해를 떠나야 했다. 임시정부 인사들도 남경·진강·항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1940년 중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는 항주·진강·장사·유주·광주·기강 등을 전전하는 이른바 ‘유랑시기’를 맞이한다. 임시정부가 첫 번째 향한 곳은 절강성의 항주였다. 임시정부가 항주에 머문 기간은 3년 6개월 남짓이었다. 남송(南宋)의 도읍이었으며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주였지만, 임시정부에게는 눈물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 폐지를 외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곳이 바로 항주였다. 

임시정부는 항주로 옮기면서부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자금을 놓고 임시정부의 지지 정당인 한국독립당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항주사건’이 그것으로, 김석이란 청년이 중국 신문에 도산 안창호를 비방하는 기사를 실으면서 문제가 야기됐다. 이 일로 김구와 이동녕이 가흥으로 떠나고, 조소앙과 나머지 4명의 국무위원까지 사표를 제출하면서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위기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기치아래 독립운동 정당이 우후준순처럼 생겨났다. 이당치국이란 정부가 아닌 당에 의해 독립운동의 중심을 세워야 한다는 것으로, 독립운동계를 아우르지 못한 임시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논리였다. 이들 정당은 신당결성운동을 벌여 1932년 남경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여기에는 한국독립당을 비롯해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독립운동 정당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이들은 임시정부 폐지를 요구했다.  

차리석. 그는 송병조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 임시정부 폐지를 반대하고 나섰다./사진제공=독립기념관

무정부 상태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추스린 이는 '차리석'이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상해를 떠날 때 끝까지 남아 안창호 구출운동에 안간 힘을 쏟던 차리석은 도산이 국내로 압송되자 1932년 11월 항주로 왔다. 그는 11월 28일 임시의정원 의장을 대신해 제24회 의정원 회의를 주관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제출해 공석인 국무위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동녕·김구·이유필·조성환·윤기섭·신익희·최동오·송병조·차리석 등이 국무위원에 선임됐으나, 국무위원 대부분이 외지에 있었으므로 실제 참가한 인사들은 2,3인에 불과했다.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임시의정원이 산회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어떤 활동도 펼칠 수 없이, 겨우 간판을 지키는 형상이었다.  

1935년에 들어 임시정부는 존립의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임시정부를 지탱하던 한국독립당에서 신당 참여파와 임시정부 지지파의 대립이 다시 불거진 것이다. 이때는 간신히 신당불참여 쪽으로 방침을 정했으나, 각 정당을 통합한 단일신당운동이 독립운동계의 대세로 기운 뒤였다. 

이때 임시정부 폐지를 단호히 반대하고 나선 이가 차리석과 송병조였다. 이들은 한국독립당을 즉각 탈당하고 임시정부 사수를 위한 의지를 공표했다. 1935년 4월 8일 국무위원 명의로 발표한 ‘포고문’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 당시부터 민족운동세력 전체를 포괄하지 못했으며, 국가의 요소도 완전히 갖추지 못했지만, 일본 통치기관에 대립해 우리 민족 스스로 통치함을 의미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비록 세력이 열세하고 불완전한 정부이지만,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포고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5월 25일 신당 창당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당을 해체했다. 이에 따라 양기탁,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유동열 등 국무위원 7명 중 5명이 단일신당인 민족혁명당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는 폐지 직전까지 내몰렸다. 임시정부는 차리석과 송병조 두 사람이 지킬 뿐이었다. 이들은 항주에서 임시정부가 문을 닫으면, 1919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이 다시 망하는 것이라며, 임시정부 사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잠시 임시정부를 떠나 있던 김구가 5월 19일〈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서한을 통해 임시정부 지지의 뜻을 밝히면서, 임시정부는 얼마간의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35년 10월 임시의정원은 차리석의 동의로 5명의 국무위원을 새로 선출한 뒤 국무회의 주석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이시영, 비서장 차리석 등 임시정부의 진용도 갖출 수 있었다. 이어 11월에는 임시정부 정당으로서 한국독립당 대신에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결집할 것을 제창했다. 이때 한국국민당은, “민족전선의 핵심은 ‘당’이며, 정부는 국민을 직접 지도하는 전체성을 갖는다. 당과 정부는 서로 표리가 되어 서로 버릴 수 없다. 장래 ‘대당’은 정부의 두뇌가 되어야 하며, 정부는 대당의 몸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표방하며, 임시정부와 당과의 관계를 정립했다. 이로서 임시정부의 존립 명분을 세워나갈 수 있었다.  

항주청사 기념관. 중국 정부는 2014년 9월 항주 임시정부 청사를 ‘국가급 항일사적지 문물중점’(국가 문화재)으로 지정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중국의 사적지, 그것도 국가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항주시기 임시정부는 활기찬 생명력은 없었지만, 죽음 직전에서 회생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항주시기 임시정부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항주에서 임시정부가 끝났으면, 임시정부의 역사를 뭐라고 써야 했을까. ‘임시정부 법통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찾을 수 없고,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도 거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뜻을 아는 듯 중국 정부는 2014년 9월 항주 임시정부 청사를 ‘국가급 항일사적지 문물중점’(국가 문화재)으로 지정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중국의 사적지, 그것도 국가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항주에서도 국가급 항일사적지로는 임시정부 청사가 유일하다.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시정부 사적지라면 마땅히 상해나 중경 임시정부 청사를 꼽아야 할 텐데, 항주를 지정한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지 항일혁명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연안(延安)을 ‘혁명의 성지’로 기리는 중국이, 그런 안목에서 항주를 주목했던 것이 아닌 가 추측할 뿐이다. 

중국 정부가 항주 임시정부 청사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할 때 한국 정부는 아무 것도 몰랐다. 뒤늦게 안 뒤에도 그에 대한 어떠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국에서는 항주 임시정부 청사의 위상이 제고되고, 중국 정부의 관리 및 운영이 강화되고 격상됐다. 2007년 개관 이래 20만 명이 넘는 관람객 중에는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후 중국인 관람객들은 더욱 늘어가는 추세이다. 항주에서 매년 열리는 서호(西湖)국제박람회에서는 항주 임시정부 청사를 소개하는 정규 프로그램까지 동원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항주시기 임시정부가 혹 '중국의 항일역사'로 기록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 앞서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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