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사실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귀스타브 쿠르베는 19세기 유럽 화단의 이단아였다. 그는 프랑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늘 가난한 서민들과 벗하며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여 유럽미술의 오랜 전통을 깨고 인간의 낭만적인 아름다움 대신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정직하게 화폭에 담았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 주면 나는 천사를 그릴 것이다"는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쿠르베의 기념비적 작품인 ‘돌 깨는 사람’은 그의 고향마을 오르낭의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렸다. 헤진 조끼를 입고 망치질하기가 버거워 보이는 노인과, 맨살이 다 드러나는 찢어진 윗도리에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멜빵바지를 입고 힘겹게 돌을 나르는 한 소년의 모습이 애처롭다. 힘겨운 삶의 한 단면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공장을 가진 자본가 계급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급으로 사회질서가 재편되었다. 두 계급의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자 ‘똑같이 잘사는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 사상이 움트게 된 당시의 시대상을 이 한폭의 그림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지어 안락한 에덴동산에서 거친 들판으로 추방되었고  땀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은 징벌로 인간에게 씌워진 굴레인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구절은 노동착취의 이유로 흔히 인용되기도 했다. 막스 베버가 그의 명저인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설파하여 인간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신의 소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열심히 일해서번 노동의 대가라는 의미를 지닌 ‘earning’은 단순히 소득을 의미하는 ‘income’과는 다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광객들을 맞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아치형 정문에는 아직도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나치가 수용자의 노동력의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한 잔인한 슬로건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유는 오직 일하는 시간 뿐 이었다. 누구를 위한 행복없는 자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쉰들러 리스트에서 보듯 노동력이 있는 이들만이 그 수용소 주변의 군수공장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그나마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고 노동력이 없는 이들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죽임을 당했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주식시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수십 수백조의 가치가 생겼다가 사라지곤 한다. 정작 실물시장은 아무런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다. 이런 신기루 같은 금융자산의 허상을 보면서 노동으로 창출된 가치야 말로 진정한 부의 원천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에 노동자는수고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아울러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화합과 양보의 미덕을 지니고 신성한 노동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결의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직한 땀이 진정 개인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이즈음 로봇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점령해 가고 있다. 앞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정신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목에서 쿠르베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새삼 노동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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