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이 활동하는 뉴욕에서 재생 종이를 접어 만든 상품이 너무 초라해 보이진 않을까.
뉴욕문구박람회장(NSS)의 부스에 들어서자 휑한 공간이 그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김민양 그레이프랩 대표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빈 공간을 두 단어 즉 환경과 사람 이야기로 채워나갔다. 비록 초라해 보일지언정 실내장식은 박스 종이를 업사이클링 해 꾸몄다. 걱정이 희망과 기대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Gorgeous! (끝내준다. 멋있다) 4일 동안 열린 박람회장에서 그레이프랩의 부스가 가장 흥미진진하고 핫한 곳이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 김민양 그레이프랩 대표
뉴요커들은 먼저 제품 디자인에 반했고 그 물건들의 제작 과정 이야기를 들려주니 더 환호했다.
“해외에서도 통했어요. 우리의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 지닌 환경적 가치와 이 제품을 만드는 발달장애인 친구들의 행복한 동행 이야기에 사람들이 반한 것 같아요.”
뉴욕박람회 출품 직후인 지난 3월. 소량이지만 미국에 첫 수출의 기회도 따냈다. 오는 6월에는 미국의 3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Kickstarter)에 그레이프랩이 만든 노트북 전용 거치대가 첫 선을 보인다. 내친김에 미국에 법인도 낼 계획이다.
접으면 하루.. 펼치면 한 달
영국 유학 시절 김 대표는 논문 준비를 위해 모로코와 터키 쪽의 취약계층 여성들을 인터뷰하러 많이 다녔다. 사막을 횡단하고 트럭을 타고 다니다 보니 큰 수첩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종이 한 장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기록했다.
‘접으면 종이 한 장이지만 펼치면 지도처럼 커지는 수첩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g플래너로 실현됐다. g플래너는 접으면 하루지만 펼치면 30일 한 달 동안의 기록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첩이다. 크기는 스마트폰보다 작지만 펼치면 지도처럼 크게 볼 수 있는 크기로 변신한다.
“ 보통 책이나 수첩은 화학적 접착제를 사용해 제본합니다. g플래너는 접착제를 쓰지 않고 접어서만 만들었기 때문에 나중에 재활용할 수 있고 폐기됐을 때 자연으로 쉽게 돌아갑니다.”
무한한 재생 종이의 세계를 알리다
전 세계적으로 벌목되는 나무 중 40%가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어지고 있다. g플래너는 12달을 각각 다른 재생지와 비목재지로 만들었다. 비목재지란 숲을 이루는 큰 나무를 베지 않고 목재가 아닌 다양한 소재로 만든 종이를 말한다. 1월 부터 12월까지 첫 장에는 종이의 원료에 얽힌 사연과 삽화가 실려있다.
“카페에서 쓰는 종이컵은 코팅이 돼 있기 때문에 99%가 재활용되지 않고 일반 쓰레기로 버려집니다. 영국에선 버려진 테이크아웃 커피컵으로 수준 높은 아트지를 만듭니다. 9월은 이 종이로 만들었어요.”
1월은 사탕수수, 3월은 버려진 잡지책, 5월은 과일찌꺼기, 10월은 가죽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펄프와 섞어 만든 종이 등 매월 각기 다른 사연이 담겨있다.
김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소재로 재생용지를 만드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에선 전무한 실정이다”라며 “국내에도 재생지를 쓰려는 사람이 늘어나면 재미있고 의미 있는 고급 재생지가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탄생에서 소멸까지 환경을 고려한 디자인
g플래너는 그레이프랩의 두 번째 상품이다. 첫 작품은 2017년 말 선보인 기하학적인 폴딩 구조로 만들어진 g스탠드이다. 역시 100% 재생 종이 한 장을 접어 만든 것으로 최대 5kg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독서대의 무게는 90g. 가벼워 휴대하기 편하다.
“일반 독서대나 노트북 거치대는 부피가 크고 코팅된 목재나 플라스틱·철로 만들어져 버려지면 잘 썩지 않습니다. g스탠드는 종이 한 장으로 최소한의 기술인 접기(오리가미)를 활용한 것으로 제품의 생산 단계에서부터 소멸까지 환경을 고려해 만들었습니다.”
그레이프랩은 여기서 더 나아가 버려지는 종이가 최소화할 수 있도록 판형을 짜고 그래도 부득이하게 남는 자투리 종이는 홍보물이나 안내 책자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오리가미 기술로 만든 그레이프랩의 제품은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고유성을 인정받아 미국과 유럽·일본·중국·한국 등 5개국에 디자인 등록을 마쳤다.
현재 g스탠드와 g플래너는 친환경 이미지를 선호하는 기업들의 기념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네이버 스토어와 예스24ㆍ1300Kㆍ채널 A방송 몰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발달장애인이 접고 그리다
g스탠드와 g플래너 모두 발달장애인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오후 2시가 되자, 사무실이 시끌벅적해졌다.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속속 출근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들은 장시간 근로가 힘들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에 맞게 1주일에 1~4회 출근한다. 임직원 8명 중 제작팀 4명은 모두 발달장애인이이다.
장애를 지녔다고 해서 시급이 낮은 것은 아니다. 기술의 정도에 따라 시급 1만 원~1만 2000원을 받는다. 이들 중 가장 오래된 직원은 발달장애인 예술가이자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는 신승호 씨다.
그는 불과 3시간 만에 독서대 45개를 접을 정도로 손이 빠르고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일러스트(삽화)를 담당한다. 승호 씨의 경우 3중 구조로 수입이 발생한다. 시급을 받고 일하고 독서대에 그림을 그리는 제작비는 따로 받는다. 그의 그림이 들어간 독서대가 팔리면 수익의 절반을 받는다. 승호 씨 이외에도 비영리 예술단체 로사이드 소속의 발달장애인 작가 2명과 협업을 통해 아트 에디션을 제작하고 있다. 역시 판매 수익을 작가들과 나눈다.
이모티콘이 가르쳐 준 상생의 기쁨
김 대표는 창업 전 10년 넘게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했다. 카카오 초기 멤버로 이모티콘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이모티콘의 수익금을 웹툰 작가와 절반 씩 나누는 형태로 사업모델을 짰다.
“서비스가 잘 될수록 카카오도 잘되고 작가도 잘 되는 걸 보면서 서로 나눠도 모두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날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피라미드식 구조는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이 아니라고 보고 이른바 ‘포도송이 이론’을 앞세워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포도는 독식해가며 몸집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옆에 또 다른 송이가 달리며 성장합니다. 누가 누구를 해치지 않고 작은 조직들이 서로 연결돼 강하게 결집되는 구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런 포도송이들을 장애인분들, 여성분들과 함께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실험이 필요했고 그래서 회사 이름도 그레이프랩(포도실험실)이라 지었습니다.”
㈜그레이프랩은 2018년 창업 한지 1년여 만에 고용노동부의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된 데 이어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이 선정한 2018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우수상을 받았다.
“상을 받고 나니 저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저희처럼 작은 기업이 어려운 게 뭔지 아세요? 인지도가 낮다 보니 신뢰도가 낮은 거예요.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같은 신뢰 높은 기관에서 상을 받으니 사업을 제안하거나 심사 받을 때 안심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봐 줍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여기에 다니고 싶어요.”
김 대표가 복지관에서 미술 봉사를 하다 만난 발달장애인 직원 우정 씨의 소원이다. 김 대표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디자인하고 재정을 튼튼히 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발달장애인 제작팀들이 갈수록 더 즐거워하고 그 가족분들도 좋아하시는 겁니다. ‘일’이란 게 단순히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 아니라 자존감을 높여주고 사회성도 길러주면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장애인분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점점 일이 능숙해지는 모습을 보니 나 혼자 힘들다고 포기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겠구나 생각했어요.”
김 대표와 인터뷰 하던날, 독립작가 발달장애인 예술가 김현우 씨가 먼걸음을 달려와 특별출연을 해줬다. 김 작가는 g스탠드의 아트 에디션 제작에 참여한 작가로 발달장애인 예술가 분야에서는 스타작가로 꼽힌다. 그는 올가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리는 아시아 작가 초대전에 한국 대표로 선발돼 작품 전시회를 연다.
전시 소감을 묻자 “ 무척 행복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작가의 어머니 김성원 씨는 아들 현우 씨가 어디를 다닐 때마다 자신이 그린 독서대를 들고 다니며 행복해한다고 전했다.
“때론 장애인 가족의 절박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도 그 때문에 상처를 입은 적도 있지요. 하지만 김 대표는 달라요.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철학이 무척 좋았고 진정성이 느껴져 현우나 저나 그레이프랩에 올 때마다 아주 행복하답니다.” --- 김성원씨(김현우 작가 어머니)
사진제공. 그레이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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