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가 죄수 인권을 지킨다, 감옥에서 법 공부한 '마틴 소스트레'
죄수가 죄수 인권을 지킨다, 감옥에서 법 공부한 '마틴 소스트레'
  • 이로운넷=박유진 기자
  • 승인 2019.05.0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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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외면한 사람들]㉗ 22년 수감...범법자에서 사회 운동가로
"독방 수감은 인권 유린"...법원 배상까지 받아내
마틴 소스트레는 '정치범 수용자'과 '정치화된 수용자'를 구별하며 "정치화된 수용자의 범죄는 원래 정치와 관련되지 않았다"며 "수감 중에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50년대 미국, 감옥 수감자들은 유죄가 판결되는 순간 헌법상 권리를 박탈당했다. 각 법원의 규칙이었다. 이 규칙에 반기를 들며 나타난 인물이 마틴 소스트레(Martin Sostre), 22년 수감 경력을 보유한 미국인이다. 

소스트레는 1923년 3월 20일, 남아메리카 출신 재봉사 어머니와 상선 종사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렘가에서 자라고 뉴욕시의 텍스타일 고등학교(현 Bayard Rustin Educational Campus)에 다니다 대공황 때 집을 돕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다. 1942년 징병돼 군대에서 항공정비사로 일하다가 4년 후 싸움에 휘말려 강제 제대했다.

첫 수감은 1952년, 헤로인 소지 때문이었다. 12년형을 선고 받고 1953년 6월 19일부터 뉴욕 주 싱싱 교도소에서 첫 형을 살았는데,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 폭탄 설계의 비밀을 소련에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형 당한 날이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은 소스트레가 그 날 전기의자가 켜질 때 교도소에 불빛이 번쩍거리는 모습을 기억한다고 전했다.

소스트레는 싱싱 교도소에서 아티카 교정 시설을 거쳐 클린턴 뉴욕 주 교도소로 옮겼다. 뉴욕타임즈(NYT)는 "그 곳에서 소스트레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클린턴 교도소에서 소스트레는 교도소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읽고 헌법을 독학했다. 또한 그는 감옥 동료이자 무슬림이었던 테디 앤더슨을 만나 1956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앤더슨은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 경전 '코란'을 갖고 있었다. 소스트레는 '이슬람 국가(NOI, Nation of Islam, 현 명칭은 Islam Community in the West)'에 가입했으며, 다른 흑인 이슬람교 수감자들과 모임을 가지며 흑인 역사와 이슬람교에 대해 배웠다. 이 행위는 교도관의 눈 밖에 나 '반(反)백인 움직임'을 위한 모임을 모집한다는 이유로 정식 종교 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소스트레는 독방에 4년 동안 갇혔다.

당시에는 죄수에게 인권이란 없었다. NPR에 의하면 소스트레는 독방에 갇혀 침대도, 매트리스도 없는 콘크리트 차가운 바닥에 자야했다. 불빛도, 화장실도 없었고 물이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도서관에 갈 수도 없었다. 소스트레와 다른 수감자 몇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 교도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들은 코란을 구매하고 NOI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소스트레는 12년을 복역하고 1964년 풀려났다. 그 해 NOI와 관계를 끊었으며, 뉴욕 주 버팔로 지역으로 옮겨 베들레헴 철강 회사에서 일했다. 모은 돈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인을 위한 책방을 열어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흑인 민족주의에 관한 도서를 채워 넣었다. 장소는 곧 지역의 좌파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 됐다. 그러나 책방의 전성기도 잠시, 1967년 여름 버팔로 지역의 인종갈등이 심해져 흑인 청년들의 폭동과 약탈이 이어졌다. 소스트레의 책방은 굳건했지만, NYT에 의하면 폭동으로 주변 여관에 화재가 발생해 소방관이 불을 끄던 중 가게 책을 거의 없애버렸다. 

1974년 뉴욕 시 다큐멘터리 영화사 'Pacific Street Films'가 소스트레의 징역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Frame-up!'을 제작했다. /사진=유투브 Remembering Martin Sostre 캡처

소스트레는 한 번 더 체포됐는데, 폭동 선도, 방화, 마약 판매 등의 혐의 때문이었다. 1968년 열린 재판은 마약 거래에 중점을 뒀고, 아토 윌리엄스가 증인으로 나섰다. 그는 책방에서 소스트레로부터 15달러 어치 헤로인을 샀다고 증언했다. 당시 백인들로 차있던 배심원석에서는 만장일치로 유죄 평결을 내렸으며, 소스트레는 41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1973년 윌리엄스는 자신의 절도 혐의를 벗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며 증언을 취소했다.

소스트레는 다시 독방에 갇혀 자신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수염 자르기와 직장 검사를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독방에 갇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1969년 최초 흑인 여성 판사였던 콘스탄스 베이커 모틀리는 그가 즉시 독방에서 나오도록 명했으며, 혼자 지냈던 372일에 35달러를 곱한 1만 3020 달러를 그에게 배상했다. 러시아의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였던 사하로프는 1975년 뉴욕 주지사 휴 캐리에게 직접 소스트레의 석방을 탄원했다. 사하로프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다. 그 해 크리스마스, 소스트레는 사면됐다. 이후 결혼하고 2명의 자녀를 뒀으며, 임차인의 권리를 위해 주로 싸우며 사회 운동을 이어갔다.

1984년 소스트레는 또 체포됐다. 그가 관리하던 건물의 세입자와의 언쟁 끝에 그를 총으로 쏜 혐의였다. 소스트레는 상대가 친구와 함께 자신을 총으로 위협했다고 주장했으며, 1987년 법원은 정당방위를 인정해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소스트레는 92세의 나이로 2015년 8월 12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NYT에 따르면 가족은 소스트레의 의견에 따라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아들 비니는 매체와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 즉 사람들이 불의에 맞서 싸우는데 영감을 주는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 출처:
https://www.nytimes.com/2019/04/24/obituaries/martin-sostre-overlooked.html
https://www.npr.org/sections/codeswitch/2017/04/14/507297469/how-one-inmate-changed-the-prison-system-from-the-inside
https://www.aaihs.org/martin-sostre-and-the-fight-against-solitary-confinement/
http://www.usprisonculture.com/blog/2012/06/12/martin-sostre-revolutionary-legal-advocate-prisoner/
https://search.alexanderstreet.com/preview/work/bibliographic_entity%7Cvideo_work%7C205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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