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기존 국제무역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으로 제시된 ‘공정무역(Fair Trade)’이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8년 국민총소득(GNI) 대비 수출입 비율은 86.8%로, 한국은 90% 가까이를 ‘무역’에 의존하고 있다. 이 중 일부를 공정무역 방식으로 바꾼다면, 보다 나은 공동체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 가는 발판이 되지 않을까. 현 시점 국내의 공정무역의 현황과 특징,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조명해본다.
세계 공정무역 단체에서는 ‘공정무역 마크’ 시스템을 통해 믿고 구매할 만한 제품을 인증했다./사진=국제공정무역기구

한국에서는 2010년 전후 공정무역 운동이 본격 확산됐지만, 1950년대부터 시작된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역사가 오래됐다. 공정무역 초기에는 몇 시민단체들이 나서 “제3세계 가난한 농부들을 도와주자”며 소비자들의 선의에 호소해 공정무역을 알리기 시작했다. 윤리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방식은 몇 번은 통했지만, 지속적 판매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공정무역은 시민단체의 ‘운동’을 넘어 이윤을 내는 ‘사업’으로 발전했다. ‘제품을 구입하면 생산자에게 얼마가 돌아간다’는 구호와 무관하게 제품의 질과 가격으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자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부 기업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자는 본래 취지와 상관없이 공정무역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예를 들어 공정무역 카카오 함유량이 턱없이 낮은 초콜릿을 만들고는 ‘착한 제품’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 판매하는 식이다. 인지도 있는 큰 기업이 공정무역 제품을 다루면서 소비자에게 알려지는 홍보 효과가 일부 있었지만, 공정무역의 개념이 지나치게 넓게 적용되면서 주요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강백 한국공정무역협의회 상임이사는 “공정함과 거리가 멀지만 공정함을 표방해 홍보하는 이른바 ‘페어 워싱(fair washing)’으로 몇 기업들이 이미지 세탁을 하고, 공정무역 제품의 인증 기준이 턱없이 낮아지자 일부 지지자들은 등을 돌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국제공정무역기구(FLO) 등 비영리 국제기구에서는 ‘공정무역 마크’ 시스템을 통해 믿고 구매할 만한 제품을 인증하기 시작했다. 공정무역 생산자?무역업자?기업 등은 FLO가 정한 기준을 통과하고 정기적 감사를 거쳐 ‘인증 마크’를 붙이고 유지한다. 소비자들은 인증 마크를 통해 공정무역 제품의 안전성?신뢰성?윤리성을 담보 받는 것이다.

서울시는 2018년 7월 국제공정무역마을위원회에서 인구 1000만 도시로는 처음으로 '공정무역마을'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사진=서울시

일부 단체와 기업 위주로 돌아가던 공정무역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민과 지역 중심의 풀뿌리운동으로 중심축이 변화했다. 2000년 영국 가스탕에서 시작된 ‘공정무역 마을운동’이 그것인데, 시민들이 일상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는 활동을 뜻한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36개국, 2175개 도시가 국제공정무역마을위원회에서 공식 인증을 받고 공정무역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공정무역마을’로 도약하려는 도시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2017년 경기 부천과 인천을 시작으로, 지난해 7월에는 서울이 인구 1000만 도시로는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공정무역도시로 인증을 받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가난한 나라에서 한 세대 만에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서울이 세계 최대 인구규모의 공정무역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라고 밝혔다. 2018년 10월 경기 화성도 공식 인증을 받았으며, 경기도 역시 도(道) 차원에서 인증을 받기 위한 여러 단계들을 밟고 있다.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 상임이사는 “한국의 공정무역은 소비자들의 선의에 호소하는 1단계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인증하는 2단계를 거치지 않고, 지역에서 실천하는 3단계 마을운동으로 곧바로 넘어간 케이스”라며 “특히 민관이 거버넌스를 잘 구축해 공정무역을 마을운동 차원으로 결합해 추진해나가는 좋은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공정무역 마을운동의 핵심은 풀뿌리 시민 기반이므로, 발전을 위해서는 민관 거버넌스를 통한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 선도적으로 인증을 받았거나 준비 중인 서울, 경기 등 지자체들은 지자체장이나 의회 차원에서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민간에서도 이를 이끌어갈 역량을 함께 키우며 기반을 넓혀갔다.

경기도가 베트남 캐슈넛과 도내 생산된 콩을 결합해 만든 로컬-페어트레이드 제품 '캐슈두유'./사진=경기도

특히 지난해 10월 지역 내에서 공정무역을 집중적으로 알리는 캠페인 ‘포트나잇’을 주관한 경기도의 활약이 돋보였다. 경기도는 광명?군포?부천?성남?수원?시흥?안산?평택?하남?화성 등 도내 10개 시에서 공정무역 강연?전시?축제?행사 등을 열어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화성시와 올해 하남시, 내년에는 고양시가 중심이 돼 ‘포트나잇’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경기도에서 행사 때 첫 선을 보인 로컬?페어트레이드 상품은 공정무역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해외 공정무역 생산자와 국내 농부가 키워낸 먹거리를 결합한 것으로 캐슈두유, 곡물초콜릿 등을 개발했다. 도는 올해도 상품 개발에 참여할 사회적경제 기업을 공모해 공정무역 활성화를 위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공정식 경기도 사회적경제과 과장은 “공정무역 제품개발 지원사업은 생산국가와 소비국가의 연대경제를 실현하는 실천이다”라고 말했다.

공정무역 마을운동은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광역단체에서 기초단체로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서울 중구, 인천 계양구, 전북 전주시, 경남 진주시 등이 공정무역 도시로 인증 받기 위해 다양한 노력 중이다. 

이 상임이사는 “아무래도 공정무역 관련 자원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보니, 서울?인천?경기 등 위주로 발전해온 게 사실이다. 민관 거버넌스 등 수도권의 경험이 잘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을 거라 본다”면서 “도시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공정무역 마을운동도 각 도시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 공정무역마을 운동은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서 시작돼 진주(경남), 전주(전북) 등 지방으로 확대되고 있다(돋보기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디자인=윤미소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