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일이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라디오방송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 작업장에 켜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귓전으로 스치면서 간혹 한두 마디가 고막을 파고들었는데 그 중 인상 깊은 말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를 정확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 말에 깃든 의미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또렷하게 살아있다. 아나운서의 설명은 대충 이랬다.

어느 시인이 우리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엄마 뱃속에 있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니 시인들이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였고 그때의 나는 문학과 거리가 먼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던 시절이니까 살아오면서 이따금씩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 그 시인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은 있었지만 찾아볼 방법이 없었고 주변에 그런 것들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어서 잊고 살았다. 

아주 가끔, 뜬금없이 ‘그때 그 시인이 누구였을까’라는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올리긴 했지만 특별히 찾아서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냥 그렇게 또 잊고 살았다. 그랬는데.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조일까. 요즘 들어 부쩍 신문, 방송에 얼굴을 내민 정치인들의 거친 막말이 기승을 부려 그렇지 않아도 정치혐오에 지친 사람들을 불신의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이쯤 되면 말의 폭력이다. 

함부로 내두른 세 치 혀의 폭력과 그때마다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그 시인이 누구였는지 찾아봤다. 이제는 열쇠말만 있으면 궁금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만능의 정보검색 시대니까 어렵지 않게 아니, 허탈할 정도로 너무 쉽게 찾아냈다. 

성선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읽어도 울림이 깊은 이 시를 쓴 사람은 한국시단 서정시의 계보를 잇고 있는 함민복 시인이었다. 함민복 시인이 맹자의 성선설을 믿든 안 믿든 그런 데는 관심이 없다. 사실, 시인은 대체로 거짓말쟁이들이고 좋은 시인일수록 거짓말이 능란하다. 어떤 형식을 취하든 시란, 상상과 은유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다래끼

아침에 일어나니 속눈썹에 봉분 하나 들어섰다

하도 찾아뵙지 않으니
아버지, 몸소 찾아오셨다

28회 경희문학상을 받은 김정수 시인의 거짓말이다. 속눈썹에 생긴 다래끼가, 하도 찾아뵙지 않아서 몸소 찾아오신 아버지란다. 작은 속눈썹에 무덤이 들어서고 그게 또 아버지라니, 이렇게 어마무시한 거짓말이 또 어디에 있나?

그러나 보는 즉시 거짓말임을 알게 되는 시인들의 거짓말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의도된 선의의 거짓말이다. 시인의 거짓말은 전혀 새로운 시선의 자극으로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우리의 양심을 깨워 일으키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며 치유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자. 거친 막말,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이 사회에 오물을 끼얹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언제까지 침묵하는 민중을 무시하고 짓밟을 수 있을까. 멀지 않았다. 멈출 수 없거든 차라리 시인의 거짓말을 배워라. 졸시 하나 보탠다.

그림자

벽에 부딪쳐야 일어서는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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