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6회기념(1919.9.17.)

흔히 3·1운동의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설명으론 아무래도 부족하다. 상식적으로도 납득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자칫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1달여 만에 급조된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정부를 신속히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처에서 생겨난 임시정부는 무려 8개에 달했다. 그 중 전단(傳單)에 그친 것도 있지만, 실체를 갖춘 것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세칭 한성정부 등 세 곳에 달했다. 임시정부가 우후죽순처럼 여러 곳에서 생겨났다고 해서 독립운동이 난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권 독립을 향한 독립운동계의 의지가 충만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임시정부는 각기 존립하지 않고,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과 통합은 오로지 독립운동의 힘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에서 발원한 한국 독립운동에는 대략 500만 명이 참가했다. 그 중심은 대한제국의 기득권층이 아니라 평민이었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이 주도한 신민회(新民會)를 보더라도, 평민 의식의 성숙과 함께 정치 이념도 근대적으로 발전해 갔다.

1910년 대한제국이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후에는 ‘제국’의 멍에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에 이은 1912년 중화민국 수립은 ‘민국’을 향한 의지에 불을 댕겼다. 신규식은 직접 신해혁명에 참가했으며, 박상진은 혁명을 통해 공화주의를 달성하려는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새로운 나라의 정체(政體)는 더 이상 군주제가 아닌 민주공화제로 자리를 잡아갔다.   

망국 이후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포부를 가장 먼저 내보인 곳은 미주 한인사회였다. 박용만 등이 주창한 ‘무형국가론’이 그것이다. 영토와 국민이 충족되지 못했지만, 해외 한인을 아우르는 정부 형태의 수립이 절실하며 대한인국민회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정부 수립을 주장할 만큼 한인사회가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1920.1.1)

당시 만주와 연해주, 미주 등지의 해외 한인사회는 30여 만명에 달했다. 이들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도 세계적 공간을 무대로 전개됐다. 때문에 독립운동계는 공간을 초월한 대동단결과 통합을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1차 대전 직전 연해주에서 성립한 대한광복군정부는 15만 명의 군인 양성을 목표로 독립전쟁을 추진한 바 있었다. 1917년에는 국내외 동포를 향해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한〈대동단결 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에서는 무형국가론과 마찬가지로 1907년 융희황제가 주권을 국민에게 양여했다고 주장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추기구로서 국민 주권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했다. 그러나 국내외 동포사회에 널리 전달되지 못하면서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동포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선구적 의미를 지녔다. 
      
국제정세도 한몫을 담당했다. 1차 대전 직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1918년 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 약소민족들의 잇따른 독립선언은 한국 독립운동계를 크게 고무시켰다. 이에 각처의 해외동포사회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3·1운동을 기획해 갔다. 

이 무렵 광무황제(고종)의 서거는 3·1운동을 폭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민국’ 수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록 망국의 군주였으나, 고종을 군왕으로 여기는 국민적 정서는 여전했다. 그러니 고종이 살아있는 한 임시정부가 국민적 호응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대동단결 선언〉이 선언으로 그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군왕에 대한 부담과 구속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 3·1운동으로 200만 명이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으니, 임시정부 수립을 미뤄야 할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즉각 국내외 각처에서 8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날 때 어디에서나 ‘제국’이 아닌 ‘민국’을 선포한 사실은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한’은 1897년 건립한 대한제국에서 유래됐다. 국호를 대한으로 삼은 것은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새로 이름을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조선은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한(韓)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마한, 진한, 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병합한 것이다. 큰 한(大韓)이라는 이름이 마땅하다”는 뜻에 의해서였다.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첫 회의에서 국호를 정할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의 복국(復國)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천명하면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정해졌다. 대한제국으로 망한 나라를 10년 만에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으로 세운 것이다. 

 

반면에 식민지 체제의 국내에서는 1910년 망국과 함께 ‘대한’, ‘한국’이란 이름은 그날로 사라졌다. 국권과 주권을 상징하는 ‘대한’, ‘한국’이란 용어를 일제가 철저하게 말살한 때문이다. 대신 조선총독부를 비롯해 조선군, 조선은행 등 모든 식민기관은 물론 사회단체까지 ‘조선’으로 대체됐다.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망국 당일 ‘대한’을 떼고《매일신보》로 바꿔지면서 총독부 기관지로 변모했다. 일제의 손이 닿는 곳이라면 ‘한국’, ‘대한’, ‘한인’이란 명칭이 철저하게 봉쇄당한 것이다. 1945년 일제 패망의 날까지 국내에서는 ‘한국’, ‘대한’, ‘한국인’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존재할 수 없었다. 오직 일본 식민지 통치에 순응하는 ‘조선인’의 삶만이 강요될 뿐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한국인’임을 망각한 채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길들여졌다. 그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계에서는 국내외 어느 곳이라도 ‘한국’, ‘대한’의 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법통성은 광복과 함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승계될 수 있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역사에 남긴 자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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