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강화회의 개회식(1919.1.18) /자료제공=장석흥

올해는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파리강화회의 100주년이기도 하다. 1차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였던 파리강화회의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식민지 민족자결 문제는 약소민족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은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한다는 것이 전제였다. 때문에 승전국 식민지의 민족자결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의 의제에서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 그것이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합의였다.

당시 일본은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했다. 독립운동계 역시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의 민족자결 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서 상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도 그랬다. 참가 자격의 유무와 관계없이, 광무황제(고종)는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극비리에 특사를 파견했다.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석상에 입장하지 못했으나 장외 활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 과정에서 이준 열사가 장렬히 순국했다. 독립운동은 그런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파리강화회의 때도 어떻게든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독립운동계는 해외 곳곳에서 대표를 파견했다. 그 중 대표적 인사가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김규식이었다. 그는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하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가 인도양을 지날 무렵 한국에서는 2·8독립선언에 이어 3·1운동이 일어났다.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국내외가 호응하면서 한국 독립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화산이 폭발한 것이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4월 초 3·1운동의 소식을 접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외교부장에 임명됐다. 그와 함께 이관용, 황기환, 조소앙, 김탕, 여운홍 등이 파리에 도착하면서 한국대표단의 진용을 갖추었다.

파리평화회(강화회의)의 임시정부 대표단(1920)(앞줄 여운홍·○·○·김규식, 뒷줄 ○·이관용·조소앙·○·○·○·○·황기환) /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제공=장석흥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에게는 파리강화회의 참석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리에 온 것은 (1)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대표 및 프랑스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 한국의 처지를 설명하고 지지를 얻어내는 것, (2)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을 알릴 것, (3)극동문제에서 한국의 중요성과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야욕을 폭로할 것, (4) 각국의 언론을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것, (5) 공보국을 설치해 외교 선전활동을 강화할 것 등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즉 대표단은 파리강화회의의 본질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오히려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알리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우사 김규식은 파리에서 이유잉, 호치민 등 세계 각국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 사진 : 국가보훈처

 

김규식은 상해를 출발하기 전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으며, 파리에 도착하자 계획대로 활동을 펴나갔다. 최근 프랑스에서 발굴된 자료들에서는 그런 활동이 구체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김규식은 루이 마랭(Louis Marin), 샤를 르부크(Charle Lebouq) 등 프랑스 인권옹호연맹 인사들과 깊게 교류를 나누며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특히 프랑스의 유명 정치인 루이 마랭은 김규식과 각별했다. 한국 문제에 깊은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김규식이 파리를 떠날 때 환송연을 베풀며 심심한 위로와 함께 1919년 9월 4일 《Éntente》에 '한국과 윌슨주의자들'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파리위원부의 통신전 제 20호에 실리기도 했다. 파리지역 국회의원 샤를 르부크 역시 김규식이 파리를 떠나기 전 환송연을 주재하며 위로했다. 로베르 브뤼셀(Robert Brussel)은 '한국 철학자'라는 글을 통해 당시 일본 외무상 가토의 망언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며 한국 독립 문제를 옹호했다. 이들의 인적 유대는 김규식이 파리를 떠난 뒤에도 이어져 1921년 '프랑스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는 기반이 됐으며, 한국친우회 회장 루이 마랭은 후일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됐다.

김규식은 중국의 이유잉(이석증)·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 등과도 깊게 교류했다. 이유잉은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하자 뉘이슈르센느 부르동 대로 2번지에 숙소를 마련해 주는 한편 베트남의 호치민을 소개했다. 중국 천진의 일간지《익세보》에 베트남 문제를 다룬 호치민의 글을 싣게 해준 이도 이유잉이었다. 호치민은 이를 계기로 파리위원부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한국대표단의 인사들과 동지적 교감을 나눴다. 호치민이 한국 독립운동을 베트남 독립운동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김규식은 러시아·미국·이탈리아·중국 등의 휴머니스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러시아 제정의회의장 조세프 미노르(Joseph Monor), 미국의 저널리스트 헐버트 아담스 깁본(Herbert Adams Gibbon), 뉴욕타임스의 찰스 셀던(Charles E. Seldon), 펠리오(Pellio), 주파리 중국총영사 라오(Lao), 프랑스 재건회의 페위(Peyeur)장군, 러시아 국가평의회의 군즈부르그 남작, 러시아 전권공사 프랑댕(Frandin) 등은 한국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김규식을 응원하고 도왔다.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행사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 외무무에 초청장을 요구하는 한편 이탈리아 언론 세콜로(Secolo)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규식이 파리에 머문 것은 5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당초 계획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동안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의 활동을 두고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대표단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도 못하고, 한국 독립 문제가 상정되지 못해 실패했다는 것이라든지, 대표단이 파리강화회의의 본질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열강에 독립을 청원했다는 것,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불신이 고조됐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사뭇 귀에 익숙한 논리와 주장들이다.

KOREANS MEETING HERE PROCLAIM INDEPENDENCE /자료제공=장석흥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고, 독립 문제를 상정할 수 있다고 보는 자체가 무리거나 잘못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논리와 주장은 파리강화회의에 임하는 대표단의 목표와 활동을 모르거나 왜곡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바 크다. 그리고 한국대표단이 파리에서 활동할 때 일제가 철저히 방해하며 내세운 논리와 너무 흡사하다. 그것을 물려받은 친일파들의 논리도 대저 같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문제가 상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던 윤치호는 ‘당국자(일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도록 침묵을 지키는 게 우리 민족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 여겼다. 그런 논리로 그는 3·1운동도 거부했다. 윤치호처럼 일본의 비위나 맞추고 침묵을 지키면 독립 달성은 결국 무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약한 친일파들의 논리였다. 그들은 ‘힘이 정의’라는 논리 위에 정의와 양심이 있다는 진리를 몰랐던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을 개별적으로 보면 하나같이 달걀로 바위를 치듯 보이지만, 수십 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달걀치기는 끝내 바위를 깨트리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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