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새와 아기 새. 북태평양 미드웨이 섬에는 100만 마리가 넘는 알바트로스가 산다. (사진 출처= 크리스 조던 '아름다움 너머'전에서)

한 번 비상으로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 그 이름은 알바트로스(Albatross)다. 그런 명성 때문일까  알바트로스는 종종 한국에선 내 자녀들만큼은 그 새처럼 높이 날았으면 하는 욕망을 자극해 학원가의 우열반을 가르는 이름에 차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새가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성년이 됐을 때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는 단지 열등 동물로 살아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새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바트로스는 바다 위를 비상하면서 3~5년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산다. 짝짓기를 할 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났던 둥지를 찾아들어 알을 낳는다. 최장 9개월 동안 암수가 번갈아 알을 품는다. 엄마 새가 알을 품으면 아빠 새는 먹이를 구하러 장거리 비행을 떠난다. 

아기 새에게 줄 한 끼를 위해 1만5000km 이상을 날기도 한다. 알을 품은 새는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꼼짝 않는다.  그 비장함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경건하게 만든다. 

드디어 새끼가 태어나고 부모 새는 먼 길을 날아 물고 온 먹이를 아기 새의 입에 소중하게 넣어준다. 아뿔싸,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먹이 중에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이 섞여 있다. 어미 새는 아마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구해온 식량이 그토록 자신이 아끼는 어린 새를 죽음으로 몰아다 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터이다.  

북태평양 미드웨이 섬, 그곳에서 난 알바트로스의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했다. 바로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크리스 조던이 8년 동안 이 섬을 오가며 촬영한 다큐멘터리 속에서다. 97분에 이르는 이 다큐 영상은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크리스 조던: 아름다움 너머 (Chris Jordan : Intolerable Beauty)> 전시회의 한 부분이다.

도슨트의 해설을 기다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남아 티켓을 끊고 혼자 둘러보려는데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던 한 중년 여성이 내게 걸어와 말을 걸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보티첼리의 명작인 '비너스의 탄생'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작품들은 자세히 보셔야 해요. 그래야 의미를 알 수 있어요. 언뜻 보기엔 그냥 사진 같지만 여기 보세요. 비닐봉지들이 보이죠?”

크리스 조던은 보티첼리나 고흐와 같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비닐과 생수병, 플라스틱 뚜껑, 버려진 라이터 등의 이미지를 모아 재 탄생시켰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알바트로스 다큐 영상을 꼭 보세요. 보고 나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많은 분들이 울면서 나오세요.”

이 다큐멘터리 필름의 하이라이트는 성장한 새가 부모 품을 떠나 먼바다로 나가는 장면이다.

알바트로스는 날아오르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위를 비워야 한다. 보통의 새라면 이 과정이 그리 힘든 것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속에 플라스틱이 뒤엉켜 있는 새들은 달랐다. 소화가 되지 않아 차곡차곡 쌓인 플라스틱들은 아무리 뱉어내려 해도 몸 밖으로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래사장을 발판 삼아 훌쩍 날아오르는 새들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영상을 함께 본 관객들은 새가 날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마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날려고 몸부림치는 새들을 볼 때면 ‘제발 날아라’라고 응원했다. 그 응원의 목소리는 마치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카메라 앵글은 날아오르는 다른 새들을 마냥 부러운 눈매로 바라만 보다 시름시름 죽어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담아냈다. 모두가 떠나고 난 휑한 자리.. 크리스 조던은 죽은 새들의 배를 갈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인간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영상이 끝나갈 무렵 여기저기서 흐느낌의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우리가 저 어린 생명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세상에서 제일 높고 멀리 날 수 있다는 새가 이 지경이면 더 작고 힘없는 새들은?”

그 물음 앞에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해답은 결자해지(結者解之)다. 그 일을 저지른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매듭을 풀어야 한다. 마구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의 저주는 이미 시작됐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른 것이 바로 그를 의미한다. 시간이 없다. 당장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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