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에서 살인 혐의로 재판장에 선 소년 자인(왼쪽)은 부모를 고발한다./사진=그린나래미디어

오랫동안 볼까, 말까 미뤄왔던 영화 한 편을 보고 기어이 우울의 늪 속으로 침잠한다. 이래서, 이럴 거 같아서 안 보려고 했는데. 나딘 라바키(1974년 레바논 출생) 감독의 ‘가버나움’은 그런 영화다. 

인종과 이념의 전장(戰場), 그 감당할 수 없는 소용돌이 안에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그 중에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꺼져간 수많은 어린 생명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불편함 때문에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을 늘어뜨린 또 다른 이유. 자유민주주의, 시장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은 ‘가버나움’ 속의 사람들과 무관한가. 우리는, 적어도 평균의 이 나라 국민은 행복한가. 아니다. 잠들지 못한 불편함은 나의 유년과 소년기에도 그와 같은 고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번번이 기성회비(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수업 중에 불려나가 뺨을 맞고 교실 밖으로 쫓겨난 기억, 흙먼지 떨어지는 공장에서 타이밍이란 알약을 먹고 나날이 철야작업을 하다가 재단용 칼에 베이거나 고속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꿰뚫리는 사고 따위는 같은 시기를 지나온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겐 특별한 추억도 아니다.  

혼자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그 지옥 같은 삶의 틀 속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이 죽지 못해 연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 모범국가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럴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는 평균이라는 흑마법의 신기루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은 최상위 소득 비중에 대한 분석을 통해 최상위10% 집단의 소득 비중이 IMF 체제 이후 급속도로 높아진 점에 주목했다. 2017년 우리나라 최상위10% 집단의 소득 비중은 50.6%로 전체 계층 소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갔다.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최상위 소득구간을 소득 1%층과 1~5%, 5~10%로 세밀하게 나눠보면 최상위 1%의 소득 비중이 해가 갈수록 가파르게 높아졌다.

소득불평등 악화속도 역시 우려할만한 대목이다. 세계불평등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20세 이상 인구 가운데 소득 상위10% 계층의 소득집중도는 2016년 기준 43.3%로, 1996년 35%에 비해 크게 올랐으며 상위1%의 소득집중도는 1996년 7.8%에서 2016년 12.2%로 크게 높아졌다.  

최저임금조차 목숨 걸고 투쟁해야 얻을까, 말까 한 이 나라의 상당수 사람들은 영화 ‘가버나움’에서 출생신고 없이 태어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유령인간들보다 무엇이 나은가. 오직 생존을 위해 전전하다가 소년교도소에 갇힌, 슬픈 눈을 가진 소년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소년의 숨죽인 절규는 OECD 35개국 중 유일하게 출산율 1(0.98)% 밑으로 떨어지고 청소년, 노인 자살률 역시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이 나라에선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눈앞으로 닥친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거대담론을 펼 만한 경제전문가도 아니고 그럴 식견도 없지만 얼마 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의 말에서 희망의 단초를 보았다.  

그는 노동시장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덴마크의 유연-안전성 모델을 제시했다. 연설 중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공공부문 정규직 근로자가 3년 내지 5년 간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는 제언은 실현 가능성을 차치하고 최근 들어본 ‘국민경제 상생론‘ 중에서 가장 참신한 것이었다. 비록 야당으로부터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해법제시가 없다”거나 “구체적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날선 비판을 받았지만, 그 방향과 방법만큼은 가장 이상적이었다. 

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딘 라바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예수 그리스도 제2의 고향, 숱한 이적(異蹟)을 일으킨 ‘가버나움’의 바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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