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의 소셜리 뷰티풀 8

스스로를 구원하며 살아가기

“그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 나의 삶은 무료했고 나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을 듣고 난 지금은 ‘나의 삶을 실수라고 생각하고 여기서 포기 말고 끝까지 나간다면 나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 지금 내 삶에 감사하고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쓴 글이 아니다. 최근 제주에서 진행한 데니스 홍 미국 UCLA 교수 초청 특강의 자원봉사자로 활약한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쓴 것이다. “사람을 돕는 데는 의사가 되어 병을 고쳐주는 것이 최고”라고 믿고 “12년 동안 의대를 지망해왔다”는 친구다. 무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제주에도 입시가 있고, 학생들의 삶은 쉽지 않다. 후기를 읽다 말고 저 부분에서 학년을 다시 찾아봤다. 학생의 어머니는 “퇴고도 안하고 급히 보냈나 보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우리 스태프들은 이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어 가슴이 찡한 가운데 기뻤다. 

행사는 내가 명함을 갖고 있는 두 곳, 제주별곶과 걸스로봇의 이름으로 제주에서 열렸다. 제주스타트업협회(협회장 윤형준)가 우리와 함께 일이 되도록 설계하고, 카카오와 로보티즈가 장소와 선물을 후원했다. 이틀 만에 신청자 200명을 훌쩍 넘겨 조기 마감됐다. 대기자 100명이 줄을 섰다. 문의전화가 쏟아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제주의 과학영재들을 구해달라!”는 외침이 이어져 결국 수용인원보다 넘치게 접수를 받았다. 보험에 가입하고 수차례 안내 메시지를 내보냈다. 

실은 제주만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시도한 <박스와 풍선으로 데니스 홍 로봇 만들기> 워크숍이나 내가 진행한 로봇 이슈 프리뷰가 궁금해 서울, 광주, 대구, 대전, 청주, 수원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다. 걱정과 달리 관객들은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지각하는 이 하나 없이 미리 강연장에 도착해 침착하게 입장했다. 아이들은 방석을 깔고 무대 앞에 앉았다. 어른들은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뒤에 서서, 혹은 계단에 주저앉아 2시간을 견뎠다. 행사는 정시에 시작돼 정시에 끝났다.

뜨거운 열기였다. 강연장 밖으로는 봄비가 내리고, 카카오의 계단형 극장식 무대 위로 수백 명의 시선이 꽂혔다. 데니스 홍 교수는 막 입국해서 두 주 동안의 전국 투어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참이었다. 피곤할 법도 한데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운이 펄펄 솟아났는지 밤새도록 객석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로봇계 전반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전문적인 질문까지, 객석의 수준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를 알고 지낸 6년 동안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무대에서, 로봇학회장에서, 미국 국방성 비밀 프로젝트 현장에서 몇 차례의 강연과 프리젠테이션을 들었지만, 이 강연은 감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관객들이 그와 함께 울고 웃었다. 어른들이 우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았다.

홍 교수의 첫 에세이집이 나온 것은 2013년 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들과 함께 대학로 샘터 근처에서 열린 번개 모임에 찾아갔다. 더 이상 중앙 일간지 기자도 아니었고, 지금과 같은 과학문화 행사의 기획자도, 여성과 성소수자를 위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이도 아니었다. 그저 제주에 사는 앞뒤 막막한 애 엄마였다. 2019년 어느 봄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강연장을 찾은 여느 부모들의 마음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큰놈은 그 일을 <소년조선일보>에 한 바닥 짜리 기사로 썼다. 

1년 뒤, 녀석은 VEX라는 교육용 로봇 플랫폼의 초등학교 한국 챔피언이 되어 홍 교수를 한 번 더 만났다. 그리고 세계대회를 마친 뒤 다시는 로봇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 친구들과 팀을 만들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아 대회에 나가는 과정이었지, 로봇이나 기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거였다. 팀원 하나가 승부욕에 불타 불화를 일으키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불상사를 겪은 뒤였다.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팀원은 귀국하자마자 입원을 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큰아이는 경쟁을 싫어했다. 경쟁을 하면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상황에 들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과학을 둘러싼 대치동의 이른바 여러 영재코스 중에 교육용 로봇으로 스펙을 쌓는 과정이 있다. 전산학과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과외 선생으로 모시고 수백에서 수천 만원을 들여 세계대회를 준비할 정도로 과열돼 있다. 우리는 그 경쟁을 우회해 아직 한국에 도입되지 않은 미국의 플랫폼을 고른 것이었는데, 그 판에 들어가자마자 경쟁과 갈등과 분열과 좌절을 맛본 것이었다. 녀석들은 겨우 초등 챔피언이었다. 챔피언 스펙을 가지고 국제학교에 로봇팀을 만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더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큰놈의 폭탄선언은 한편으로 엄마 프로젝트의 배우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루지 못한 옛 꿈을 투사하는 부모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나이 마흔이 되도록 그 옛날 부모의 투사를 의식하는 어린아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 모습이 서로 부딪힌다는 걸 깨닫자마자 투사하는 부모 노릇을 멈추기로 했다.

꿈은 셀프. 그리하여 아들은 아들의 길을, 엄마는 엄마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시 4년이 지나, 만나고자 하면 누구든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고, 가고자 하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제주로 돌아와 우리 모자와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4년만에 처음으로 큰아들과 친구들에게 걸스로봇 후디를 입히고 자원봉사를 시켰다. 평생 단 한 번의 기회로 여기는 다른 자원봉사자 친구들의 감격 어린 표정을 보며 무언가 느껴주기를 바랐다. 뒤풀이를 마친 다음날, 녀석의 미국 사립 명문고 입시 실패 소식을 들었다. 지난번 스카이캐슬 이야기에서 언급한 진짜 상위 1퍼센트 학교들이었다. 고액 컨설팅도 통하지 않고 어떤 준비도 없이, 아이가 직접 작성해 무작정 들이댄 원서는 2500명의 준비된 학생들 속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왕년의 고도지능아는 한국의 영재코스에서 스스로 탈출한 데 이어, 미국의 엘리트 코스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데니스 홍 교수와 나는 뒤풀이에서 엘리트 학교가 아이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바로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강연을 열고 대안적인 과학교육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모순적이게도, 기존의 코스를 따르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어떤 가시적인 증명을 원했던 것 같다. 고입이 그 증명이라기엔 너무도 성급하지만 말이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꼬마애가 데니스 홍이 만든 시각장애인을 위한 자동차를 느끼러 왔을 때, 꼬마는 그 어두운 곳에서 희망이라는 꿈이라는 빛을 보았을 것이다. 난 비록 앞이 보이긴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그 꼬마와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꼬마가 더 밝은 세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난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촛불은 누구나 될 수 있고,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내가 힘들 때면 주위에 그런 촛불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난 그런 믿음을 얻었고 희망을 얻었다.”

이 글을 쓴 학생에게 상품으로 카카오에서 후원한 인형을 고르라고 했을 때, 이번에는 중3 학생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천진난만함으로 가득 차 물었다. “하얀 물개를 골라도 되나요?” 캐릭터 설명을 읽어보니 초코잼을 너무 좋아해 잼병에 주둥이를 박고 먹다가 입 주위에 푸른 멍이 들어버린 하프물범이라고 했다. 이름은 앙몽드. 그래, 의사가 아니면, 로봇영재가 아니면, 명문 보딩스쿨이 아니면, 라이언이 아니면 어떠랴.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구원하며 살고 있다. 머리와 꼬리가 맞물리는 환상을 봤다. 어느 한 시절을 마치고 다른 한 시절을 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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