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독립선언서〉가 세계 각국어로 널리 전파됐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0년 후인 1929년 프랑스 파리에서〈독립선언서〉와 3·1운동이 한국역사소설의 주제로 다뤄진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한국역사소설이 바로 서영해의《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éenne》이다.

이 책은 28세의 청년 서영해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펴낸 것이다. 그때까지 프랑스인들은 일본이 왜곡 선전한 내용에 따라, 중국의 오랜 속방으로 자주와 독창적인 역사와 문화를 갖지 못한 한국인들이 야만 상태에 있다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비로소 문명을 접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총독부는 이런 내용을 불어판 선전 책자로 만들어 유럽에서 왜곡된 한국 역사를 퍼트렸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한국 역사 문화의 진실을 알게 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더욱이 간결하고 유려한 문장, 심오하면서도 뛰어난 시적 운율을 지닌 이 책에 매료됐다. 불어를 익힌 지 8년밖에 안 되는 한국 청년이 유창하게 불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독립선언서〉가 파리위원부에 의해 1919년 불어로 번역됐으나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독립선언서〉의 정신이 널리 알려진 것은 10년 뒤 이 책을 통해서였다.

서영해는 프랑스로 유학할 당시만 해도 불어를 전연 모르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11년의 초·중·고등 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소르본대학 철학부 및 언론학교를 이수하며 불어를 익혔을 뿐이다. 서영해 자신도 “불어는 나의 모국어가 아니므로 자연 서투를 수밖에 없어 선뜻 책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저함 없이 써야 했던 것에는 유럽의 독자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일을 지체할 수 없었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 양심의 행동이자 의무라 여겼기 때문”이라 고백한 바 있다.

한국인으로서 양심의 행동과 의무, 즉 독립운동의 열정으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문화가 42세기 동안 찬란하게 꽃피웠으며, 아름다운 풍습과 자연 환경을 지녔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의 처지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독립선언서〉와 3·1운동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언론은 “한국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양심과 정의, 자유와 독립, 인도와 평화를 지향한 〈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정신은 곧 인류가 추구할 보편적 가치였다. 

이 책은 프랑스를 넘어 국제연맹과 벨기에, 스페인, 이집트 등지에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서영해는 이 책을 통해 유럽의 저명한 평화주의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세계 평화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을 널리 알렸다.

최근 발굴 자료에 의하면, 이 책을 간행할 무렵 서영해는 로맹 롤랑(Romain Roland)이 발행하던 《유럽l'Europe》이란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로맹 롤랑은 “쟝 크리스토프”라는 10권의 대하소설로 19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문호였다. 그의 저서 "베토벤" 이나 "괴테와 베토벤" 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필독서로 꼽힐 만큼 명저로 알려졌다. 서영해 역시 이 책을 국립중앙도서관 “영해문고”에 간직할 만큼 두 사람은 각별했다.  

서영해는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가 1928년 창간한 《세계MONDE》에서도 기자로 활동했다.《세계》는 국제정세를 다루는 문화주간지로, 프랑스 뿐 아니라 스위스, 벨기에,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에 배포됐다. 당시 극동문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서영해는 주로 극동문제 관련 기사들을 기고했다.《세계》에 참가한 동인으로는 아인슈타인, 막심 고리키,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피카소, 호안 미로 등이 있었다.

앙리 바르뷔스는 1918년 반전소설 “포화(Le feu)"를 발표해 평화주의의 깃발을 드높인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앙리 바르뷔스와 어려서부터 절친한 관계로《세계》에 참가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격렬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인 루이 아라공은 시인이자 작가였다. 서영해는 루이 아라공이 발행한 잡지 《Ce soir》등에 기사를 기고하면서 교류했다.

특히 1945년 8월 15일 파리에서 한국의 해방을 맞자, 서영해는《Ce soir》에 8월 16일자로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초의 희생자였다’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단언키는 어렵지만, 서영해가 1940년 이후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하는 것도 루이 아라공과의 관계를 통해 이뤄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루이 아라공은 피카소의 전시회 카타로그에 서문을 쓸 정도로 이들 동인들과 교류가 깊었다. 로맹 롤랑이 1936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랑브라 궁전에서 자신의 작품을 공연할 때 피카소가 무대 장치를 맡을 정도로 두 사람의 유대도 긴밀했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나의 조국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스페인에서 살지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화했다. 피카소는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1월 "한국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란 제목의 대형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한동안 학살의 주인공이 미군이라는 오해 때문에 이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다. 피카소가 한때 공산주의를 동경한 것은 사실이지만, 곧 탈퇴해 프랑스의 현실 참여에 몰두했다. 그가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즉각 작품을 구상하기까지에는 서영해와의 교류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영해가 스페인 내전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던 것처럼 피카소 역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서영해와 피카소는 조국의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고 평화를 추구했던 점에서 공감대를 나눈 것은 분명하다. 

서영해는 앙리 바르뷔스가 창립한 "진보사회당des amis du Front populaire" 클럽에서 1936년에서 1939년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앙리 바르뷔스가 사망한 1935년 이후 루이 아라공 등이 주관했을 것으로 보이는, 진보사회당 클럽은 반파쇼, 반제국주의를 지지하는 평화주의 지식인들의 '국제정치상황'을 논하는 토론의 장이였다.

서영해는 반나치, 반전, 세계 평화라는 공감대를 이루며 국제적 평화운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것이 1937년 발렌시아에서 열린 스페인인권옹호세계위원회였다. 당시 유럽의 진보적 지성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참가할 때, 로맹 롤랑을 비롯해《유럽》,《세계》의 동인들도 참가했다. 서영해도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다. 서영해의《어느 한국인의 삶》은 1929년 스페인에서 서평이 실리며 크게 호응을 얻은 바 있었다. 서영해의 영혼이 담긴《어느 한국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독립운동 전파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서영해의 활동 무대와 인적 교류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했다. 유럽을 무대로 전개한 그의 독립운동은 이처럼 세계 평화를 향한 길에서 모색됐다. 서영해는 한국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자 전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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