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이라고 하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거나 적과 맞서 무장투쟁에 나선 열사나 의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 것’이 하나둘씩 말살되던 일제강점기, 한국문화를 지키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해 힘썼다. 문학, 한글, 문화재, 음악, 영화 등 각자의 분야에서 신념을 지키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 시대를 아파한 문학인, 이상화?이육사?윤동주

윤동주는 암울한 시기에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썼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대표적 방법은 문학이었다. 당시 우리말로 글을 쓰거나 일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학인들은 침묵하거나 우회적으로 쓰거나 망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한 시기에 저항을 했다가 일제에 협력해 친일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화(1901~1943)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작품으로 민족의 봄날을 꿈꿨다. 이육사(1904~1944)는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청포도’ ‘절정’ ‘광야’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정제된 상징과 은유를 통해 드러냈다. 윤동주(1917~1945)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당시 문학인으로서 성찰과 고뇌를 ‘참회록’ ‘쉽게 쓰여진 시’ ‘서시’ 등에 담아냈다. 

# 우리말 연구한 한글학자, 주시경?이윤재?최현배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한글 연구를 한다.

일본은 한글 교육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가르치며 우리 문화를 파괴시켰다. 일제강점기 말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 구호를 앞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했다. 이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한글학자, 한글단체 등이 생겨난다. 특히 잡지 ‘한글’을 만들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는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말모이’를 통해 재조명됐으며, 280만 관객을 동원했다.

주시경(1876~1914)은 우리말 이론 연구로 ‘국문문법’ ‘대한국어문법’ 등을 편찬하고, 후학 양성을 통해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1920년 이윤재(1888~19443), 최현배(1894~1970) 등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우리말을 연구하고 강연, 잡지 출간, 사전 편찬 등 활동을 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지만, 이들 덕분에 우리말이 지켜지고 보존된다.

# 전 재산 털어 우리 문화재 수집한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과 보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일본,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 재산과 이생을 바쳐 헌신한 이도 있다.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전형필(1902~1962)은 막대한 재력을 민족 문화재 수집 및 보호에 쏟아 부었다. 고려와 조선의 불상, 그림, 서예품, 도자기 등을 총망라해 모은 결과 한국 미술사 연구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가 세운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관’은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후손들에게 소장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대표적 소장품으로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 보물인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있다. 

# 항일투쟁 참여한 음악가 윤이상?한형석

윤이상은 일본 유학 중 귀국해 항일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체코의 드보르작이나 스메타나처럼 ‘음악’을 통해 조국에 헌신한 예술가들이 있었다. 윤이상(1917~1995)은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1943년 귀국해 항일 활동에 참여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유학하며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을 시도하는 다양한 곡을 내놓는다. 국내에서는 한형석(1910~1996)이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군가’ ‘압록강행진곡’ ‘국기가’ 등 여러 군가를 작곡해 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 영화로 항일 정신 보여준 배우 나운규?김염

나운규(왼쪽)과 김염은 각각 한국과 중국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영화’를 통한 나라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영화의 선구자로 꼽히는 나운규(1902~1937)는 감독이자 극작가, 배우로 1인 3역을 맡아 활약했다. 1926년 개봉한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은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 활동한 김염(1910~1983)은 1930년대 중국 영화의 황제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항일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대로’를 비롯해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영화 여러 편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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