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16살배기 자동차 (사진/백선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6년 동안 희로애락의 순간을 함께 했던 자동차가 드디어 큰 사달이 났다. 그동안 소소한 것들을 고쳐가며 써왔지만 이젠 더 버틸 재간이 없어졌다. 수리비가 중고차 값보다 더 나온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폐차로 얻을 수 있는 고철 값보다 수리비가 더 드는 상황이다.

임시방편으로 고쳐 쓴다 해도 다른 곳이 얼마 안가 내 지갑을 털어갈 기세다. 수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전초전이 될 수 있다. 중고차 딜러한테 2003년산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며 폐차를 권유했다.

16년 만에 새 차를 구입하려다 보니 모든 것이 새롭다. 내 자동차는 CD보다 더 이전 버전인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장착돼 있다. 가장 최신 것이라면 하이패스 리더기와 지인이 건네준 내비게이션이다. 그나마 업데이트를 게을리해 가끔씩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카마스터가 넘겨 준 자동차 안내 책자를 보니 세상 참 좋아졌다. 별별 기술이 차 안에 다 녹여져 있다. 웬만한 건 뭐든지 알아서 척척해준다. 주차할 때도 주행할 때도 똑똑한 도우미가 장착돼 운전자에게 편리함을 준다. 물론 그 하나하나가 옵션인 것이 흠이지만. 

지금 내 차에 비하면 슈퍼카에 가깝지만 난 옵션이란 선택지 앞에서 이것저것 더 구겨 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운전할 때 느꼈던 모든 위기 상황들이 마치 한꺼번에 내 앞에 등장할 것처럼 이런저런 위험 요소들을 떠올리고 그 대책을 기술에 의존하려 했다. 

불안감이 증폭될 때마다 하나 둘 옵션이 늘어가고 가격은 덩달아 올라간다. 그 때 나의 모든 불안함을 일시에 잠재운 건 곁에서 지켜보던 아들이 건넨 말이다.

“엄마, 지금껏 그런 도움 없이도 운전하는데 아무 불편 없이 잘 살았잖아. 자율 주행 차도 아닌데 센서에 모든 걸 맡긴다고 사고가 안 날까? 지금처럼 차선 변경할 때 반드시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전·후방 똑바로 쳐다보면 될 일인데. 그리고 우리 수준에 기본 사항만 갖춘 차량도 지금 차에 비하면 정말 스마트한 거야. 엄마는 김 여사도 아닌데 무슨 걱정?”

맞다. '그런 도움 없이도 지금껏 잘 살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상황이 깨끗이 정리됐다.  선택 품목들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것들이었다. 기본만 하고 그에 딸린 옵션은 모두 사양했다.

폐차를 시키려고 자동차 트렁크와 글로브박스를 여니 이번에는 길게는 16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 눈에 띈다. '나한테 이런 물건이 있었나?'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물건들이다.

주섬주섬 싸 들고 올라와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했다. 기준은 요즘 미국에서 미니멀리즘 열풍을 몰고 온 리얼리티쇼 프로그램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에 나온 법칙을 적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에서도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미국의 가정집을 방문해 정리법을 전수해주는 내용이다.

정리의 제1원칙은 '(그 물건을 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이다. 그가 말하는 설렘이란 "강아지를 품에 안거나 좋아하는 옷을 입었을 때 느끼는 따스하고 기분 좋은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버릴 때 한 가지 지켜야 할 점이 있다. 그동안 함께 해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많은 추억이 담긴 물건일수록 더욱 가슴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전하라고 조언했다. 그 프로그램은 혼돈의 집을 정리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실은 비움이 가져온 집안과 한 개인의 삶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리의 최종 목표는 지금 가진 것을 아끼는 법을 배우고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나 자신을 위해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설레지 않는 물건들을 버리고 남겨진 물건들은 꺼내 쓰기 편하게 정리하면서 삶이 달라졌다.

누가 정리할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잦았던 부부는 사이가 좋아졌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힘든 시간을 보냈던 미망인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남편의 옷가지와 쓰던 물품들을 암 환자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고 돌아오면서 "40년간의 추억은 다 제 머릿속에 있어요. 그건 아무나 가져갈 수 없죠"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와 CNN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의 여파로 올 들어 미국 곳곳에서 집안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을 기부하거나 중고시장에 파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나도 16년간 정이 든 자동차를 정리하며 곤도 마리에가 가르쳐준 데로 고맙다는 인사를 자동차에 건넸다.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우리 가족을 태워줘서 고마워'라고. 그렇게 인사를 건네니 아쉬운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월든, 숲속의 생활(Walden)'이란 저서로 19세기 시인과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느냐로 부(富)를 평가하지 말고 얼마나 비우며 살 수 있느냐로 부를 평가하라"

이제 곧 봄이다. 봄은 묵었던 먼지를 털고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우리의 삶도 채움이 아니라 비움으로 새봄을 맞이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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