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에서 살인 혐의로 재판장에 선 소년 자인(왼쪽)은 부모를 고발한다./사진=그린나래미디어

‘1000만 영화’가 등장해 극장가가 떠들썩한 가운데, 11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 조용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유명 스타를 내세우거나 미국?유럽권 작품도 아닌, 비전문 배우 캐스팅을 통해 완성한 레바논 영화 ‘가버나움’ 이야기다. 현재 전국 60개도 안 되는 스크린에서 상영되며, 오직 영화의 힘으로만 이례적으로 11만 7000명을 불러 모았다. 

‘가버나움’의 활약은 지난해 5월 열린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고, 시리아 난민 출신 배우 자인 알 라피아에게 15분간 기립박수가 쏟아질 때 이미 예상된 것인지 모른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은 우연히 캐스팅 디렉터에 눈에 띄어 ‘자인’ 역으로 길거리 캐스팅됐다. 

작품은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12살 정도로 짐작되는 ‘자인’이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년은 판사에게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며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라는 다소 뜻밖의 이야기를 던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를 통해 자인이 부모를 고소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펼쳐진다. 

영화 '가버나움'에서 자인은 불법이민 여성 ‘라힐’의 아기 ‘요나스’를 돌본다./사진=그린나래미디어

자인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단칸방에서 동생들이 바글거리는 단칸방에서 산다. 부모는 대책도 없이 아이 6명을 줄줄이 낳고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방치’해 버린다.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주스를 팔거나 위험한 물건을 운반하며 돈을 벌고, 때때로 감옥에 팔 마약을 만들어 파는데 동원된다.

자인의 11살짜리 동생 ‘사하르’가 초경을 시작하자 부모는 기다렸다는 듯 동네에 나이든 아저씨에게 매매혼을 시킨다. 그 길로 가출한 자인은 불법이민 여성 ‘라힐’을 만나고, 그의 아기 ‘요나스’를 돌보게 된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자인이나 불법체류 중인 라힐은 모두 사회에 ‘등록되지 않은 자’들로, 이들의 일상은 괴롭고 고된 매일의 연속이다.

다른 삶을 갈망하던 자인은 출생서류가 필요해 집에 돌아오지만, ‘사하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한 사하르는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이에 분개한 자인은 사하르의 남편을 칼로 찔러 5년형을 받고 투옥된다. 법정에 선 자인은 “사는 게 똥 같고 지옥 같다”며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하다”며 결국 그들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앙투안 아잠 주한 레바논 대사는 30여 개국 주한대사를 초청해 '가버나움' 상영회를 열었다./사진=그린나래미디어

여기서 제목 ‘가버나움’의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기적이 많이 행해진 이스라엘의 도시이지만,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 탓에 퇴락한 곳이다. 영화의 배경인 베이루트 거리에서의 삶은 가버나움처럼 혼돈과 혼란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드리워져 있다. 레바논 출신의 나딘 라비키 감독은 실제 난민과 빈민으로 뒤엉킨 레바논의 참혹한 상황을 스크린을 빌려 고발한다.

매매혼, 빈곤, 방치, 노동 등 아동학대를 비롯해 세계적 이슈인 난민 문제를 있게 다룬 ‘가버나움’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에서 진정성을 가득 뿜어낸다. 이에 힘입어 최근 30여 개국의 주한대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가버나움’을 관람하는 특별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상영회를 주최한 앙투안 아잠 주한 레바논 대사는 “레바논에는 시리아 난민 150만명, 팔레스타인 난민 50만명이 있다. 이들은 어떠한 국제적인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위태로운 조건에서 산다”며 “주한 대사들에게 현재 난민들이 처한 현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밝혔다.

관람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인’의 존재감 그 자체였다. 많은 평론가들이 “다른 요소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스타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눈빛(김소희)” “20대처럼 행동하고 40대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김혜리)” “보통 배우들의 명연기가 주는 울림과 차원이 다른 서늘함(김지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 시리아 난민 출신으로 길거리 캐스팅된 자인은 '가버나움' 출연 이후 노르웨이에 정착했다./사진=그린나래미디어

자인 외에도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해당 역할과 비슷한 배경의 인물들로 발탁했다.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실제 불법 체류자였고, 한 살배기 ‘요나스’ 역의 보루와티프 트레져 반콜과 ‘사하르’ 역의 하이타 아이잠도 레바논에서 체류하던 도중 캐스팅됐다.

제작진은 작품에 출연한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다. 칸영화제 초청 이후 자인은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8월 노르웨이에 정착했으며, ‘요나스’를 연기한 트레저와 가족들은 불법 체류 중이던 레바논을 떠나 케냐로 돌아가는 등 영화의 소셜 임팩트가 이어졌다. 

라바키 감독은 “단지 불행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을 고소하기로 결정한 소년의 솔직한 눈빛을 통해 어떤 이유로든 무시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한 소년의 싸움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영화 한 편이 상황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논쟁을 시작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국내 개봉 1달차. 이달 24일(현지시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라 결과에 따라 상영기간이 늘어날지 모른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