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외국인(大韓外國人)’.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을 뜻하는 말이다. 최근 미국, 독일, 중국, 일본, 가나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의 외국인들이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이들의 유별난 ‘한국 사랑’이 널리 알려졌다. 

사실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다. 특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시절,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헌신적으로 도운 외국인들의 도움이 더해지며 역사의 방향이 달라졌다. 나라 간 이동이 지금처럼 자유롭지 않았던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외국인들은 왜 조선인들을 도왔으며, 어떻게 독립을 지원했을까. 역사에 기록된 주요 인물들의 활약상을 조명해본다.

# ‘대한매일신보’로 독립운동 보도한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영국 출신 언론인 베델(1872~1909)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데일리 클로니클’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다. 일제의 만행을 지켜본 베델은 강력한 항일 논조의 신문을 발행하며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국한문, 순한글 버전의 ‘대한매일신보’와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한국 언론을 철저히 탄압했지만 치외법권을 누리던 베델이 발행하는 신문은 손댈 수 없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며 독립운동을 격려했고, 한국인들은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고종 역시 베델을 지원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했다. 37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베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묻혔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 건의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

선교사로 들어와 조선의 학생들을 가르친 호머 헐버트(왼쪽).

호머 헐버트(1863~1949)는 1886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도운 선교사다. 을사조약 후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영문 잡지 ‘한국평론’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건의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 운동에 적극 협력했다. 

이후 미국에 돌아가 ‘한국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 등 한국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으며, 3.1운동을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받아 내한했으나 병사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민족자결주의’ 알려 3.1운동 불 지핀 교육자: 프랭크 스코필드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1968년 ‘건국공로훈장’ 등을 받은 프랭크 스코필드.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는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알려 한국에 3.1운동의 불을 지피는 데 역할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독립운동의 현장을 카메라로 담고 기록을 남겼다. 특히 일제가 자행한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자행한 민간인 살해 및 방화 사건을 사진으로 찍어 외국 언론사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1920년 캐나다에 돌아가 강연, 기고 등을 통해 한국의 비참한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1958년 대한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에 초빙돼 내한했으며,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69년부터 한국에 영구 정착해 여생을 보냈으며, 1970년 외국인 최초로 한국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이륭양행’ 통해 임시정부 지원한 기업인: 조지 루이스 쇼

임시정부를 도운 조지 루이스 쇼와 1920년 체포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1880~1943)는 중국 단둥에 설립한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외 연락 시 필요한 교통국 사무소를 이륭양행에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김구 선생이 3.1운동 직후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무기·출판물·자금 등을 안전하게 운송·보관하며 독립운동을 확산시켰다.

1920년 내란죄로 일본에 체포돼 4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에도 독립운동을 도왔다.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자 1937년 이륭양행을 매각했으며, 1943년 중국 푸저우에서 사망했다. 1963년 한국 정부는 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유족을 찾지 못해 전달하지 못하다가 2012년 손녀 마조리 허칭스 씨를 찾아 전달했다.

# 남편 박열과 조선의 독립 꿈꾼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오른쪽)와 박열 부부의 이야기는 영화 '박열'에서 재조명됐다.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가네코 후미코(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부인이다. 1903년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1912년 충북 청원 고모의 집에 살며 7년간 조선에 머물렀다. 이후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에 동감했으며,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면서 1922년 박열을 만나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로 일본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두 사람은 결혼서류를 작성해 부부가 됐으며, 사망 이후 경북 문경에 안장됐다. 2017년 박열과 후미코의 실화를 담은 영화 ‘박열’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후미코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 조선 독립운동가를 변론한 일본 변호사: 후세 다츠지

변호사 후세 다츠지(왼쪽)은 영화 '박열'에도 등장한다.

후세 다츠지(1880~1953)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한국인의 인권 향상을 위해 투쟁한 일본인 변호사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인해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의 변론을 시작으로, 제1·2차 조선공산당사건, 한신 교육투쟁사건 등 광복 전후 재일본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다. 1923년 총독부 관공서 폭파를 계획한 김시현, 1926년 일왕을 폭살하려는 거사로 체포된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도맡으며 알려졌다.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이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등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