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고아 1인 입양기구, '검은 천사' 메이벨 그래머
전쟁고아 1인 입양기구, '검은 천사' 메이벨 그래머
  • 박유진 객원 기자
  • 승인 2019.02.16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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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외면한 사람들]㉑獨 전쟁고아 '브라운 베이비' 500명 입양 도움
본인도 12명 입양...교황 '박애상' 수상
“○○씨 별세, △△ 교수 모친상=□일 A병원 발인 ◎일 오전. 연락처 02-1234-5678” 신문을 읽다가 한 켠에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부고 기사를 본 적이 있나요?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 언론의 부고 기사들은 매일 지면을 할애해 망인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 중에도 뉴욕타임즈는 그동안 백인 남성에 대한 부고가 대부분이었다며 2018년 3월부터 ‘간과했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Overlooked)’라는 부고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운넷은 이를 참고해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 갈색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태어났다. 패전국 독일이 연합국과 소련국에 점령당한 후, 백인 독일 여성과 흑인 미군 남성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이다. NYT에 의하면 이들은 대부분 1945년부터 1955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5천명이 넘었다. 독일인들은 이 혼혈 고아들을 속된 말로 ‘브라운 베이비’라 불렀다. 메이벨 그래머(Mabel Grammer)는 혼자서 ‘브라운 베이비’ 12명을 입양하고 500명에게 새 삶을 찾아준 여성이다.

그래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아칸소 주에서 트레드웰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뉴욕타임즈(NYT)에 의하면 10세 때 그는 복막염을 앓았지만 당시 살던 동네에 흑인을 위한 병원이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빠듯했기 때문에 수술 받지 못했다. 결국 나아졌으나 병은 불임으로 이어졌다.

그래머는 미용학교 졸업 후 미용사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를 나와 1940년대에 ‘워싱턴 흑인 신문(Washington Afro-American)’에서 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었다. 미 육군성에서도 커리어를 쌓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군인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때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나누는 행위를 막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머가 일했던 워싱턴 흑인 신문 (사진출처: By AgnosticPreachersKid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141237)
그래머가 일했던 워싱턴 흑인 신문 건물 (사진출처: By AgnosticPreachersKid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141237)

1950년에 그래머는 미 육군 선임중위였던 오스카 그래머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독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간 그래머는 전쟁고아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쟁 후 군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으며 혼자 남겨진 독일 여성들은 사회적 시선에 못 이겨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그래머는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렀다. 그리고 남자아이 한 명을 입양했다. ‘브라운 베이비 입양계획(Brown Baby Plan)’의 시작이었다. 그래머는 직접 10명의 아이들을 더 입양했다. 가장 어린 딸 나디아는 “수녀들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더 입양할 수 있냐’고 물어오기도 했다”고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NYT에 의하면 지역 신문에서는 그를 ‘검은 천사’라 칭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래머는 고아들을 돕자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을 직접 입양하기도 했지만 입양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아이들을 입양할 미국인 가정이 있는지 탐색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동 입양 의향이 있는 가정들이 각종 추천서와 증명서들을 보내오면 그래머는 법적 절차를 밟고 공식 서류를 제출하는 등 입양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직접 끝냈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항공을 설득해 항공비를 크게 할인받아 500명의 입양아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래머 부부와 그의 아이들(사진 출처: EWTN 페이스북 동영상 캡쳐)
그래머 부부와 그의 아이들(사진 출처: EWTN 페이스북 동영상 캡쳐)

논란도 있었다. 몇몇 독일 공공단체는 그래머가 해외 입양을 진행하기에는 아동 복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어떤 인권단체들은 해외의 아이들이 아니라 당장 미국의 ‘짐 크로우법(흑인 차별법)’에 시달리는 아이들부터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입양된 전쟁고아들 중 몇 명은 가정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입양된 전쟁고아 중 한 명이었던 셜리는 NYT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래머는 1인 입양 에이전시였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미 최초로 흑인 여성 육군 중장이 된 나디아는 미국 가톨릭 채널 EWTN을 통해 “어머니는 한 사람의 작은 시작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준 사람”이라고 연설했으며, NYT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주어졌던 기회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머는 1965년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지냈다. 그와 남편은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박애상(humanitarian award)을 받았다. 이후 2002년, 고혈압과 치매의 합병증으로 그래머는 사망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자료출처:
https://www.nytimes.com/2019/02/06/obituaries/mabel-grammer-overlooked.html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local/2002/06/26/mabel-grammer-dies/e4288d14-4750-457f-b325-2d04612255d4/?noredirect=on&utm_term=.6d87757a6a7a
https://www.facebook.com/ewtnonline/videos/mabel-grammer-ordinary-woman-extraordinary-legacy/1015553388087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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