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만 명의 한국인들은 천성이 게을러 조상이 전해준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해 지금 형체도 없게 됐다.”
프랑스 교사의 강의에 한국인 중학생이 책을 집어 던지며 반발했다. 며칠 뒤 학생은 자료를 한가득 가지고 나와 “한국인은 게으르지 않으며 한국의 역사의 문화는 위대하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1924년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닌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가 겪은 일화다.
이 일을 계기로 서영해는 한국의 역사 문화와 독립운동을 유럽에 알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1929년 그가 프랑스어로 쓴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e)’이 그 결과물이다. 책이 출간된 지 무려 90년이 지난 2019년 서영해의 소설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전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프랑스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유럽 각국의 언론사에 일제의 한반도 강탈과 잔학한 만행 등을 알렸다. 1947년 귀국했으나 이듬해 상하이로 넘어간 이후의 소식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서영해라는 인물이 잘 알려지지 않아 소설의 존재 자체도 낯설지만, 파리에서는 출간 당시 1930년 한 해에만 5쇄를 인쇄할 만큼 크게 주목받았다. 주로 일본을 통해 한국을 왜곡된 시각으로 보아왔던 프랑스인들은 한국역사소설(韓國歷史小說)이라 이름 붙은 ‘어느 한국인의 삶’을 통해 비로소 한국 역사 문화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1920년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만 해도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던 서영해는 9년 만에 유창한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실제 이 책에서 그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는 어휘가 고급스러우며 문장이 유려하다. 당시 언론 및 독자들은 책에 대해 “간결하고 유려한 문장이 시적 운율을 지니며, 심오한 뜻이 담겨 호소력을 배가시킨다”는 평을 쏟아냈다.
형식의 유려함보다 주요하게 평가받은 부분은 소설 속에 녹여낸 독립에 대한 열망이었다. 서영해는 소설 속 주인공 ‘박선초’를 통해 조국의 해방운동에 헌신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박선초는 실존인물은 아니었지만 독자들은 그를 가상인물로 여기지 않았으며, 픽션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의 진실로써 소설을 바라봤다.
총 3부로 구성된 ‘어느 한국인의 삶’은 역사인 듯 하면서 소설이고, 소설인 듯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담고 있다. 1부는 42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 문화를 비롯해 근대 한국의 정세와 혁명을 서술하고 있으며, 2부는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전통 풍습에 대해 묘사했다. 3부에는 박선초의 독립운동과 3.1운동 등을 다루며 조국 해방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특히 3부 말미에 3.1운동 때의 ‘독립선언서’ 전문을 번역해 대미를 장식했다. 소설 속 박선초는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붙잡혀 총살당한다. 서영해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선초에 대해 “그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비록 몸은 없을지라도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박선초야말로 진정한 인도주의자, 정의, 영원한 자유다!”라고 서술한다.
소설을 한국어로 옮긴 재불 번역가 김성혜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진실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해설을 맡은 장석흥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는 “자유?평화 사상에 바탕을 둔 서영해의 독립운동은 외롭고 힘든 가시밭길이었지만, 그 자취는 한국 독립운동만 아니라 세계 평화 차원에서도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느 한국인의 삶=서영해 지음, 김성혜 옮김, 장석흥 해설, 역사공간 펴냄. 272쪽/ 1만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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