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이나 직업의 귀천도 없었다. 지역적으로도 국내 뿐 아니라 한인이 사는 곳이면 만주·미주·연해주 등 해외 어느 곳이든지 하나가 되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며,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은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그 과정에서 평민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체로 떠올랐다.  

3·1운동은 단순히 일거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아니었다. 종교계가 이념을 떠나 하나로 결집한 것은 말 그대로 획기적이었다. 종교적 배타성이 강한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면 종교 이념을 초월해 민족 독립을 외쳤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종교적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3·1운동을 통해 구현됐던 것이다. 다종교 민족인 한국에서 종교의식이 민족의식보다 앞섰다면 3?1운동의 일원화와 총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보듯이, 서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나긴 종교전쟁을 치러야 했고, 인도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힌두교의 인도, 이슬람의 파키스탄, 불교의 스리랑카 등으로 민족이 분리될 만큼 종교적 배타성이 민족성을 압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민족 독립을 위해 종교 이념도 뛰어넘는 특유의 힘을 발휘했다. 이는 3·1운동을 기획한 종교 대표들만이 아니라 대중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중앙의 지도자들은 물론 지방에서도 천도교 신도들과 기독교 신도들이, 또는 불교 승려와 기독교 전도사들이 한데 어울려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민족 독립을 위한 길에서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었다. 3·1운동에서 보여준 종교적 총화는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 민족주의의 특질 그 자체였다. 

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 후 해산하는 시위대/자료사진제공=독립기념관

3·1운동의 민족 총화적 성격은 참가자들을 세대별로 볼 때 보다 명확해 진다. 50여 년간 전개된 한국 독립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에 참가한 1세대를 비롯해 2, 3, 4세대가 뒤를 이었다. 세대별 독립운동의 양상과 성격 역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드러냈다.  

독립운동 1세대는 대략 1830∼1850년대 전후 출생자들, 2세대는 1870년대 전후 출생자들, 3세대는 1900년 전후 출생자들, 4세대는 1920년 전후의 출생자들이었다. 3·1운동에는 1, 2, 3세대가 모두 참가했다.  

1세대는 동학농민군과 의병, 개화개혁운동 등에 참가한 인사들이다. 1세대는 반봉건과 반외세라는 시대적 과제 아래 복잡한 인적 구성과 다양한 성격을 드러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운데 민족대표 33인으로는 손병희(1861∼1922), 이종훈(1858∼?), 권동진(1861∼1947), 박인호(1855∼1940), 오세창(1864∼1953)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개신교 대표 이승훈(1864∼1930), 불교대표 백용성(1864∼1940) 등이 1세대의 인물이었다.   

1870년대 출생한 2세대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시대를 열어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어려서 전통 학문을 익히다가, 격변기를 맞이해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며 구시대와 신시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이동녕(1869∼1940), 양기탁(1871∼1938), 이동휘(1873∼1935), 김구(1876∼1959), 안창호(1878∼1938), 김동삼(1878∼1937) 등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만주 독립군, 해외 한인사회 지도자 등이 그들이었다. 민족대표로는 개신교의 길선주(1869∼1935), 양전백(1869∼1933), 불교의 한용운(1879∼194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동학농민군이나 의병에 참가한 경우도 있으나, 러일전쟁 전후 계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근대적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 2세대는 신민회 이래 독립운동계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3세대는 2세대와 달리 신시대에 태어나 어려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소년기에 망국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3·1운동 때 20세 전후의 청년으로 성장하며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 의열단의 김원봉(1898~1958), 3·1운동의 한위건(1896∼1937), 유관순(1902∼1920), 대동단의 나창헌(1896∼1936), 6·10만세운동의 권오설(1899∼1930) 등이 그들이다. 3세대는 3·1운동 전후 새로운 사조인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독립운동의 폭과 깊이를 더했으며, 1920년대 이후 노장년층의 2세대와 함께 독립운동의 양대 축을 형성했다.   

그렇게 볼 때 3·1운동은 노장년층의 1,2세대가 지도층을 맡고, 3세대인 청년이나 학생들이 만세시위의 선봉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1,2세대의 참가는 그동안 축적한 독립운동 역량, 즉 동학농민전쟁과 의병, 개화개혁운동, 계몽운동 등을 3·1운동으로 계승 발전시킨 의미를 지녔다. 그런가 하면 3세대는 3·1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력으로 등장했다. 1,2,3세대가 어우러졌던 3·1운동은 30여 년간 쌓아온 민족 역량을 총결집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만세운동의 대중화는 독립운동계를 일신하는 기폭제가 됐다. 1910년대만 해도 독립운동을 선각자의 몫으로 보는 시각이 컸지만, 대중의 물결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것이다. 독립운동이 대중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조직도 새롭게 정비됐다. 3·1운동 전까지는 구시대적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이 잔존했으나,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면서 사상과 이념도 근대적으로 변모했다. 3?1운동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며 민주공화정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이처럼 3?1운동의 물줄기는 구시대와 신시대를 구분 짓는 분수령이었다. 이제 백성은 군주를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 것이다.

3·1운동에서 여성의 참가는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특히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집밖 출입조차 제한됐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아낙네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은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1운동을 통해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돕는 종속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독립운동의 주체로 떠올랐다. 3·1운동 직후 남성들의 단체와 별개로 여성의 독립운동단체들이 방방곡곡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은 그런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것을 반영하듯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초안한 ‘헌법’에서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다. 그에 따라 여성들이 오늘날 국회의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당당하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던 영국에서 1927년에 가서야 여성이 보통선거권을 가졌던 것에 비하면 혁신 중의 혁신이 아닐 수 없었다. 3·1운동은 만세운동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촉진시켜 갔던 것이다. 100년 전 총화와 혁신을 이룬 3·1운동의 함성과 메아리는 오늘날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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