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3·1운동이 주목받는 것은 광복 이래 처음이 아닌가 싶다. 1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당연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더 깊은 성찰이 따르길 바란다.

그 첫 번째가 3·1운동의 역사적 뿌리 찾기다. 3·1운동에는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종교 이념도 초월한 민족 총화의 만세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평민이 있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피지배의 위치에 놓였던 평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3·1운동의 배경 내지 계기를 말할 때 흔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파리강화회의, 광무황제(고종) 승하, 일제 식민지배, 1910년대 독립운동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평민이 부상한 이유를 설명해 내기에는 미흡할 뿐이다. 또 3·1운동이 1차 대전 종전 후 국제적 외인(外因)에 의하거나 식민지 폭압에 저항해 일어난 것이 되고 만다.  

3·1운동의 원류는 평민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백암 박은식의《한국독립운동혈사》는 그런 점에서 주목된다. 1920년에 간행한《혈사》는 3·1운동에 관한 최초의 역사서다. 백암은 “독립운동은 최근 30년 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라 했다. 동학농민군은 많게는 300만 명에서 적게는 수십만 명에 이르렀으며, 희생자만 30만 명에 달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평민의 혁명”이라 정의한 그는 3·1운동에서 천도교가 나선 것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못 이룬 혁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진단했다. 3·1운동 때 천도교의 참가를 동학농민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15명의 천도교 대표 중 동학농민군 출신이 1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2,30대 청년시절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한 바 있으며, 5,60대에 이르러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나선 것이다.

3.1운동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피지배의 위치에 놓였던 평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사건이기도 하다. 사진은 1919년 3월 1일 광화문 비각 앞에서 시위 모습/사진제공=독립기념관

《혈사》는 동학농민전쟁·의병전쟁·독립협회 등을 민족혁명의 과정으로 이해했으며,  그런 혁명의 전통이 3·1운동을 폭발시킨 원동력이라 설파했다. 그것이 백암의 민족혁명사관이었다. 백암은 혁명과정에서 민권과 민중을 강조했으며, 특히 역사 발전에서 민중의 역할을 주목했다. 이런 역사관은 백암만이 아니었다. 도산 안창호 역시 동학농민전쟁과 개화개혁운동을 독립운동의 연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민족혁명이라 일컬었다.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혁명과 독립운동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학에서 비롯해 의병과 계몽운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족혁명과 독립운동을 온 몸으로 실천한 백범 김구는 민족혁명의 산증인이었다.

그러면 동학농민전쟁의 동력은 어떻게 3·1운동에 이르렀는가. 동학농민군은 일본과 전투에서 패퇴한 이후 1895년 의병에 가담했다가, 1896년 전기의병 해산 후에는 독자적 농민항쟁으로 나타났다. 남학당·영학당·동학당·북대·남대·초적·화적 등의 농민조직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1900년 활빈당으로 정비되다가, 1904년 한일협약에 의해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반제의 구국이념을 내세우며 의병으로 전환해 갔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평민의 성장은 동학농민전쟁에 이어 의병의 전개 과정에서도 두드러졌다. 유생들이 주도한 전기 의병과 달리 중기 의병에서는 평민이 장악해 갔으며, 평민 의병의 확산과 함께 구시대의 신분제도 무너져 갔다. 인간 평등의 구현이 근대의 본질이라면,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적 문명의 수용만이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이나 의병전쟁 등에서도 평민의 성장을 촉진해 갔던 것이다. 이런 의병전쟁은 3?1운동 직전인 1918년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의 역사적 뿌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개신교 대표들에는 독립협회나 신민회 등 개화개혁 및 계몽운동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30,40대에 개화개혁,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3·1운동에 이르러 민족대표로 나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서구적 문명을 수용한 이들은 동학농민전쟁과는 상반된 이념과 노선의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민족적 결합을 이뤘던 것이다. 그것이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이었다. 즉 3·1운동은 종교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노선과 이념까지 초월한 민족 총화의 광장이었던 것이다.  

개화개혁운동의 후신인 계몽운동에서도 평민의 역할이 더욱 확대됐다. 개화개혁의 흐름은 갑신정변의 굴절을 겪은 뒤 갑오경장, 광무개혁 등으로 이어지다가 1904년 일제 침략을 맞이해 기존의 개화개혁에 반제를 덧붙여 구국이념으로 무장한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계몽주의는 개화운동이나 개화개혁운동을 계승한 구국 이념이자 논리였다. 그러나 1907년 정미조약과 군대 해산 등으로 일제 침략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교육과 언론에 의존한 계몽주의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사회진화론적 사고에 함몰되면서 힘의 강자인 일제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던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신민회는 의병의 무장투쟁 방략을 받아들이며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을 모색해 갔다. 이들의 목표는 절대로 대한제국의 회복이나 복국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평민들은 ‘제국’이 아닌 ‘민국’의 건설을 꿈꾸어 나간 것이다. 그것은 민족혁명의 진전이자 역사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정신과 혼마저 망실된 것은 아니었다. 의병전쟁은 1910년을 전후해 무대를 옮겨 만주 및 연해주로 근거지를 찾아 나갔다. 계몽운동은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 일제의 노골적 침략에 직면하면서 신민회를 중심으로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을 추진해 갔다.  

망국 이후 해외 한인사회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국가 건설의 의지를 가장 먼저 표방한 곳은 미주의 한인사회였다. 미주에서는 박용만 등에 의해 무형국가론이 등장해 정부수립 운동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들은 망국 전후 융희황제(순종)가 주권을 포기했다면서 제국의 시대를 청산하고 민국의 시대를 천명했다.  

독립운동의 공간이 해외로 확장되면서 1910년대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변천해 갔다. 특히 1911년의 신해혁명,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한국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의 정체성을 계승 발전시켜 갔다. 박은식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민족의 혼과 얼’을 강조하면서 1915년《한국통사》를 짓고, 신규식은《한국혼》을 통해 독립운동의 정신을 밝혀 나갔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연해주에서는 대한광복군정부 등을 세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국내에서는 대한광복회와 같은 혁명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3·1운동의 뿌리는 이렇듯 다원하고 깊었다. 민족혁명 과정에서 성장한 평민적 기반을 바탕으로 국제정세의 변화 및 광무황제의 독살설 등이 겹쳐지며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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