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 확충, 육아 휴직, 남녀동일임금 보장등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엄마의 역할'과 '커리어'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상황을 안 만드는 것이다. 여성을 포기하면 인재의 절반 이상을 잃는 것과 같다."(여성 국가지도자 에르나 솔베르그 노르웨이 총리)

해외 여성 지도자의 이런 일갈을 국내에 대입하면 한국 사회가 한참 멀었다는 판단은 그리 과하지 않다. 9%. 서울 스타트업 (신생벤처) 창업가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그중 아이를 둔 엄마 창업가는 집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적다. 기혼 후 버티다 대부분 육아 앞에서 백기를 드는 현실이다. 여성들이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성장해 나갈 순 없는 걸까.

이로운넷은 2019년 연중 기획으로 [여성과 소셜, 창업을 향한 그들의 도전]을 준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 창업가들의 생생한 경험담과 그들의 열정에 불씨를 댕기는 지원 조직의 목소리를 집중 전달하고자 한다.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도전하고 부침을 겪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인재의 절반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궁극적으로 추상적 남녀, 여여, 세대 갈등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에서 여성의 역할을 조명하고자 한다.

# 두 아이의 엄마인 홍주은 진저티프로젝트 공동대표는 파트너 기관과 중요한 미팅이 잡힌 날 돌봄에 공백이 생겨 당혹스러웠다. 돌도 안 된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설 수도 없었고, 회의를 미룰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이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건 직장동료들의 이 한마디였다.

"애를 데리고 출근하면 어때?"

그날 회의실 밖에선 어린이용 텐트가 등장했고 손이 비는 동료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아기와 놀아줬다. 홍 대표는 회의를 잘 끝냈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일반 직장에선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제겐 오히려 큰 힘이 됐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 조직은 힘든 상황들을 함께 고민해주는 환경이라는 것. 그 안아주려는 힘이 저에게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어요."(홍주은 진저티프로젝트 공동대표)                                                                   

진저티프로젝트는 개인과 조직의 건강한 문화를 연구ㆍ교육ㆍ출판하는 스타트업이다. 구성원은 총 9명. 이 가운데 4명이 엄마들이다. (사진제공=진저티프로젝트)

급할 땐 사무실이 어린이집, 직장동료가 보모

홍대표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한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오랜 외국 생활 후 귀국해 다시 직장을 다니려다 보니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애가 눈에 밟혔고 애도 엄마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때 서현선 공동대표가 말했다.

"엄마가 일하는 직장을 구경시켜주면 어떨까?"

서대표의 말에 용기를 내 그는 큰 애를 데리고 출근했다.

"비록 그날 하루 완벽하게 업무를 수행하긴 어려웠지만 이후 엄마의 출근에 대해 아이의 거부감이 줄었어요. 엄마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맥락을 이해하게 된 거죠. 당시 5살이었던 아이가 이젠 초등학교 2학년이 됐네요."

두 번의 경험이 있은 후 진저티프로젝트엔 새로운 조직 문화가 자리 잡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직장과 동료들이 비빌 언덕이 돼주는 것이다.

2014년에 설립된 진저티프로젝트는 개인과 조직의 건강한 문화를 연구하고 교육, 출판을 진행하는 스타트업이다. 구성원 9명은  모두 여성이며 이 가운데 4명이 엄마다. 첫 출발은 결혼과 육아 등을 이유로 일을 그만둔 여성 3명이  뭉쳐 시작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던 터라 삶 속에서 불거지는 예측불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일을 위해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8.11. 서울혁신파크 상상청에서 진행된 워키드샵(workidshop) 현장. 진저티프로젝트는 10여 명의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출근해 일하는 경험을 가져보고 느낌들을 공유했다. (사진제공=씨닷)

"과거의 조직문화에선 일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했죠. 여성들이 맘 놓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문화란 어떤 것일까 우리 스스로 다양한 실험을 해가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서현선 진저티프로젝트 공동대표)

그는 "모든 직장이 어린이집을 갖출 수 있는 여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것이 엄청난 복지체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힘든 한순간을 견뎌낼 방법을 상상할 수 없는 경직된 문화"라고 진단했다.

아이와 함께 출근할 수 있는 문화는 여성 창업가들 사이에 점차 확산되고 있다. 부모교육전문 기업 (Growing Mom) 사무실 한쪽엔 대형 놀이매트가 비치돼있다. 이다랑 대표를 포함해 팀원 11명은 모두 엄마들로 아이 손을 잡고 출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회사에선 같이 놀아줄 돌봄 선생님도 불러준다.

한편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오는 2020년 개관을 목표로 여성가족 복합공간인 스페이스 살림을 준비하면서 부모가 일하는 공간 옆에서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코워킹스페이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초연결사회.. 근로시간, 장소 선택 가능

서현선 진저티프로젝트 대표는 반년 동안 주 3회만 일했던 경험이 있다. 지난해부터는 다시 주 5일 풀타임으로 일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면서 육아에 대한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주 5일이든 혹은 그 이하로든 회사와 사전 합의 아래 근무일수와 시간 선택이 가능하다.

사무실 출근도 의무사항이 아니다. 업무 공간은 집이 될 수도 있고 카페가 될 수도 있다. 맡은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된다. 업무 형태와 상관없이 정직원이고 급여는 업무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지난해 6월 입사한 안지혜 팀장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회사와 상의해 근무일수를 줄이거나 늘리고 이에 상응하는 급여를 받기 때문에 특혜나 배려를 받았다는 느낌이 적다"며 "근무일수가 적다고 동료들에게 미안하거나 눈치를 보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서 대표는 "그런 심리적 가벼움이 조직에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감정을 덜어준다"면서 "유연함이란 물질의 형태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자기 주도성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그로잉맘 사무실 출입구엔 아이와 함께 출근하는 직원들을 위해 대형 놀이매트가 세워져있다.(사진제공=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그로잉맘 역시 팀원들은 출퇴근 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등·하원 시간에 맞춰 보통 오전 10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 가장 많다. 사무실에도 매일 나올 필요가 없다. 어디에 있든 주어진 업무만 끝마치면 된다. 주 1회는 회사로 출근해 한 주의 이슈를 점검하고 한 달에 한 번 ‘기분전환의 날(Refresh Day)’로 선택해 다 함께 속내를 털어놓고 즐거운 활동들을 해본다.

이 같은 문화는 비단 엄마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서 대표는 "자기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 밀레니얼세대들도 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무시간이나 사무공간이 자유롭다고 해서 느슨한 직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업무용 메신저나 회사가 구축한 연결 시스템을 통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서로 확인이 가능하다. 끊임없는 대화는 기본이고 신뢰를 바탕으로 강한 책임감이 요구된다.

여성 일자리 대책 '생애 주기별 맞춤형' 필요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4월 기준 경력단절여성 수는 184만 7000명으로 전년대비 1만 5000명 (0.8%) 증가했다. 일을 그만둔 사유는 결혼(34.4%), 육아(33.9%), 임신ㆍ출산(24.1%)등이 92%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가족돌봄(4.2%), 자녀교육(3.8) 순으로 나타났다. 연령 계층별로 살펴보면 30-39세가 88만 6000명(48.0%)으로 가장 많았고 40-49세가 66만명(35.8%)으로 그 뒤를 이었다. 

 

나현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원은 '고용 없는 성장시대, 여성 일자리의 미래'라는 포럼에서 "위와 같은 통계는 현실적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장시간 근로나 불규칙한 근로시간 및 자녀 양육과 가사 부담 때문에 일하기 곤란한 상황임을 입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인력들의 노동시장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 개선이 필요하며 남녀고용평등과 더불어 취업지원 기관의 전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주경 서울시중부여성발전센터 소장도 한 정책세미나에서 "유연한 근무제로 생애주기별 여성의 삶에 한 이해와 문제를 고용 복지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더 보기] 서현선 진저티프로젝트 대표가 제시한 여성 취· 창업 제고 방안

서현선 진저티프로젝트 공동대표

“자격증보다 네트워크가 더 중요”

“직무에 집착 말고 역량을 분석하라”

“경단녀란 고정 프레임을 벗자”

평생직장, 종신고용, 한 번 배움으로 끝나는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지속 가능한 일을 위해선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1. 자격증보다 네트워크

경력단절이 된다는 건 많은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즉 '고립'을 뜻한다. 고립은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1순위다. 경력이 쉰다고 혹은 풀타임 업무가 아니라고 내개 역량이 없는 것도, 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역량이나 가치를 확인할 대상이 점점 끊어지면 다시 시작하는 게 어려워진다.

일을 다시 하고 싶다면서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제가 뭘 준비해야 할까요, 어떤 자격증을 따야 할까요? " 난 자격증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집단에 들어가 만남의 기회를 갖거나 공간을 찾아가 보라고 권한다.

자격증 하나 더 있다고 갑자기 힘이 생긴다든지 뚫고 나갈 기회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가벼운 스터디 모임이나 책 읽기 모임 등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의 환경이나 업무를 관찰해보라. 느슨하지만 사회적 관계망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이 자격증보다 더 중요하다.

2. 패치워크 커리어(Patchwork Career) 관점을 지녀라

급변하는 사회에서 이전에 자신이 하던 업무와 앞으로 할 일이 1대 1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이젠 경력을 패치워크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패치워크란 각각의 다른 천 조각을 조합해 하나의 커다란 천을 만들 듯이 다양한 경험들을 새로운 일에 연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직무와 역량은 서로 다르다. 전 직장에서 내가 한 일은 국제협력이었다. 지금은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 이는 기획이란 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자신의 경험 속에서 그동안 쌓아온 역량들을 스스로 해석해보고 새로운 일에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난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창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창업은 나와 먼 다른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꽤 어울리는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흔히 사회에서 표현하는 경력단절이라는 경험이 나에겐 창업이란 커리어를 갖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3. 경력단절여성이란 고정된 프레임을 벗자

흔히 사회에서 경력단절여성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프레임으로 보면 상대방이 갖고 있는 잠재력이나 역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경력단절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고 연령대나 경력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사회는 하나의 틀 안에 가둔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를 둔 연령대의 여성들로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하고 지원책을 마련한다.

소셜 섹터와 경력단절여성들을 이어주는 루트임팩트의 '임팩트커리어 W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경력복귀를 준비하는 분들 중에는 외국계 금융업계에서 임원까지 한 분도 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가 그들까지 도와야 하는가? 

그러나 크게 보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고급 자원들이 그대로 땅에 묻히는 격이다. 한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손실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지원 방식이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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