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이란 게 그렇고 그런 거지(You know, it‘s like anything else)” -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씽 엘스’ 중
<XX 은행 12/31 18:55 출금 394,218원>. 제가 2018년에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는 건조하게도 보험료 출금 알림 메시지였습니다. 이후 신년을 숨죽여 기다리는 듯 5시간 5분의 적막이 흘렀고, 자정을 맞아 신년축하 메시지가 폭죽처럼 터져 올랐습니다. 매해 찾아오는 12월 말일과 1월 1일이 만나는 자정의 익숙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해 바뀜이라는 순간은 연속되는 일상의 분기점일 수 있을까요. 1년 365일은 인쇄된 달력처럼 하나의 상자 안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는 걸까요. 보험료 메시지로 건조해졌던 나의 감정은 순간, 도마뱀 꼬리처럼 싹둑 잘려 지난해라는 이름표를 단 체로 묻혀버리고, 잘린 부위에서 새로운 꼬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 나오는 것이 신년인 걸까요. 오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한해의 절망을 지우고 희망을 다시 채우고자 신년의 축배를 들 것입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서 겨우 깨달은 것은 섣달그믐 날 밤에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씀도 다 거짓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짐을 덜어준다던 당신의 약속도 거짓이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썩은 것들이 있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위협과 차별에 노출되는 현실에도 변화는 없었습니다. 부를 분배하는 것보다 불행을 평등하게 나누는 사회가 더 안전합니다. 한 사람이 져야 할 불행이 분산될 때 죽을 뻔한 사람은 생채기만 남기고, 실직의 위기에 놓인 사람은 일자리를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바꾸어놓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지난해와 같고, 여전히 여전히 지지난해와도 같습니다. 답답한 지속입니다.
치열한 삶의 흔적과도 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한 세상을 더 오래 살아야 하는 삶의 부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세 시대는 현대 의학이 숨겨놓은 덫입니다. 우리가 아직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입니다. 나이에 걸맞게 우리 몸과 마음은 시들어 갑니다. 다시 시간은 끊김 없이 흘러가겠죠. 한파에 이어 불볕더위가 찾아올 겁니다. 어제의 하늘을 가린 미세먼지가 여전히 머리 위에 있을 겁니다. 오늘은 2019년인데도 말이지요.
우리는 하루 사이에 무엇이 바뀌기를 기대한 걸까요. 어느 것도 획기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렇게 해보겠다!” 외쳐도 창피하지 않은 날입니다. 그 말이 지켜지지 않아도, 공허하게 되돌아와도 누구도 탓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아마 새해 첫날의 미덕이겠지요. 오늘은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당신의 자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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