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파이가 된 인도 공주 '누르 인아얏 칸'
영국 스파이가 된 인도 공주 '누르 인아얏 칸'
  • 박유진 객원 기자
  • 승인 2018.12.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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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외면한 사람들] ⑮WWⅡ 파리-런던 유일 연결고리...영국·프랑스 무공훈장 받아
NYT, "영국민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는 인물...50파운드 신권 초상 후보"
“○○씨 별세, △△ 교수 모친상=□일 A병원 발인 ◎일 오전. 연락처 02-1234-5678” 신문을 읽다가 한 켠에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부고 기사를 본 적이 있나요?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 언론의 부고 기사들은 매일 지면을 할애해 망인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 중에도 뉴욕타임즈는 그동안 백인 남성에 대한 부고가 대부분이었다며 2018년 3월부터 ‘간과했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Overlooked)’라는 부고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운넷은 이를 참고해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올해 영국중앙은행은 50파운드 지폐 신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영국민들 사이에서는 신권에 인쇄될 초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뉴욕타임즈(NYT)에 의하면 인물 후보에 마거릿 대처 전 수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등 백인 영국인들도 올랐지만, 그 중에는 모스크바 태생이자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영국 스파이 '누르 인아얏 칸(Noor Inayat Khan)' 포함돼 있었다.

누르 인아얏 칸
어린이 동화 작가에서 영국 스파이가 된 '누르 인아얏 칸'

누르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미국인 어머니 오라 레이 베이커와 인도인 아버지 하즈랏 인아얏 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즈랏 인아얏 칸은 18세기 인도 마이소르 왕국 통치자의 후손으로, 인도 바로다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수피즘을 전파하기 위해 서양 국가들을 전전했다고 NYT는 전했다. 인아얏 칸 가족은 192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지냈다.

누르가 13살 되던 해 아버지는 인도에서 순례를 하는 중에 사망했다. 누르는 어린 나이부터 2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돌보느라 바빴지만 프랑스 음악학교인 에꼴 노르말 드 뮤직끄드파리(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에서 공부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배우는 등 무사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39년에는 불교 설화를 영어로 번역한 ‘20가지 자카타 우화(Twenty Jataka Tales)’를 출판하며 작가로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 프랑스가 위험해지면서 누르의 가족은 영국으로 떠났다. 전쟁이 터진 이듬해, 누르는 '여성 영국 공군 부대(Women's Auxiliary Air Force)'에 지원했고, 무전병이 되기 위해 훈련받았다. 칸의 전기 작가였던 쉬라바니 바수는 “비폭력을 굳게 믿었던 누르와 그의 남동생은 (전쟁의 원인이 된) 파시즘에 저항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누르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드라마, '나치의 적: 누르 인아얏 칸의 이야기'
누르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드라마, '나치의 적: 누르 인아얏 칸의 이야기' 포스터 (사진출처: IMDB)

누르는 프랑스어 실력 덕분에 SOE(특수작전수행대) 대원으로 뽑혀 파리에서 활동했다. SOE는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이 적국의 주요인물 암살이나 정보수집 등을 목적으로 만든 영국 비밀 정부기관이었다. 쉬라바니 바수에 의하면 칸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파견된 첫 번째 여성 무전병이었다. 누르는 일에 대해 열정적이었지만, 어린 나이와 적은 경험 탓에 동료들로부터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칸의 상관이었던 프랭크 스푸너는 칸의 인사정보란엔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이 적성에 맞을지 의문이 든다”고 적었다. 동료들은 그가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주의를 믿는다는 이유로 멀리하기도 했다.

여러 차별 속에서도 누르는 실력을 인정받아 1943년 ‘잔느-마리 르니에르’라는 이름의 간호사로 가장해 직접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 코드명은 ‘매들린’이었다.

활동을 시작한 지 10일 만에 그와 함께 있었던 다른 모든 영국 스파이들이 독일군에 붙잡혔다. SOE는 누르에게 영국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했지만, 누르는 이를 거절하고 혼자 남아 영국 공군의 탈출을 돕고 배달물을 전달하는 등 죽은 정보원들의 몫을 했다. 독일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를 자주 옮기고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기까지 했다고 NYT는 보도했다. 쉬라바니 바수가 쓴 전기에 의하면 누르는 “파리 지역과 런던을 잇는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누르는 결국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NYT에 의하면, 그는 1943년 10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출발하려던 때 이중 스파이로부터 배신당해 나치정권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에 붙잡혔고, 포르츠하임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 9월 12일에는 다하우 강제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고문을 받다가 다음날 사형대에 올랐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누르는 전쟁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정부로부터 ‘조지 십자 훈장’과 프랑스 정부로부터 ‘무공 십자훈장’을 받았다. 2013년에는 영화·교육 NGO 유니티프로덕션재단(Unity Productions Foundation)에서 누르의 일생을 담은 다큐드라마 ‘나치의 적: 누르 인아얏 칸의 이야기(Enemy of the Reich: The Noor Inayat Khan Story)’를 만들었다.

 

자료출처:
https://www.nytimes.com/2018/11/28/obituaries/noor-inayat-khan-overlooked.html?rref=collection%2Fspotlightcollection%2Foverlooked
https://www.nytimes.com/2018/10/19/business/uk-50-pound-bill.html?module=inline
https://www.youtube.com/watch?v=6Kx0yNu-aa8
https://www.youtube.com/watch?v=X2nM12xbAUM
https://www.upf.tv/wp-content/uploads/sites/196/2018/02/Noor-Khan-Film-Screening-Ki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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