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 일할 때 제가 사는 집보다 훨씬 큰 여러 개의 화장실을 갖춘 호화주택을 설계할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웅장하고 세련된 건물을 짓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한편으론 공허함과 허탈함이 밀려왔지요. 그 때마다 묻게 되더군요. 나는 과연 건축가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말이죠.”

                                       -   이승한 건축가 (지문도시건축 공동대표)

 

“ 건축은 공공재입니다. 아무리 소유주가 개인이라도 지나는 사람들이 건물을 보고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지요. 그 건물들이 모인 도시 역시 생활환경에 있어 공공성과 사회적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 조현정 건축가 (지문도시건축 공동대표)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고민들을 건축이란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열망했던 두 건축가는 사회적기업이란 그릇을 만나 문제의 실타래를 하나 둘 풀어내고 있다. ㈜ 지문도시건축은 국토교통형 예비사회적기업이다.

 

(주)지문도시건축은 아츠스테이 인 문래 건물 3층에 입주해 있다.

 

건축의 공공성에 꽂힌 건축가 셋이 뭉쳤다.

㈜ 지문도시건축은 올해 4월 조현정, 이승한 그리고 현재 파리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최영순 건축가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다. 이들을 엮어준 건 다름아닌 사회적기업가육성과정이었다.

조 대표는 경주에서 열린 세계문화유산도시총회에서 알게 된 최영순 건축가에게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에 함께 도전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에 최대표가 흔쾌히 동의하고 그가 알고 지내던 이승한 건축가가 동참하면서 세 사람은 본격적인 사회적기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승한(왼쪽)·조현정(오른쪽) 공동대표

이들은 도시재생분야에 특화된 사회적기업 육성사업을 통해서 중간지원 조직기관인 (사)퍼스트경영기술연구원과 사회적기업 ㈜ 안테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사회주택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안테나와는 파트너 관계로 발전했다. ㈜ 지문도시건축은  안테나와 협력 사업으로 서울시 사회주택 ‘아츠스테이 신림’과 ‘아츠스테이 창신’의 설계를 맡았다.

사회주택은 목돈 마련이 어려운 신혼부부나 청년 등의 주거취약계층을 위해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되는 임대주택이다. 공유공간을 활용해 입주 세대들의 커뮤니티 활동을 활성화하도록 지원하는 구조로 설계된다.

이승한대표는 “건축이 단순한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주거 취약계층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여럿이 모여 가치 있는 일을 만들어 갈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전했다.

지역에 특화된 도시재생.. 주민과 함께 풀어간다

지문도시건축은 지난 3월 국토교통부가 주관한 “주민참여프로젝트” 사업에, 사회적기업 (주)안테나 운영팀의 자문단으로 참여했다. 이들이 맡은 지역은 경남 창원시 진해구로 올해 1월 창원 도시재생지원센터와 창원시에서 주최한 리노베이션스쿨(빈집 재생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인연이 된 마을이다. 지문도시건축은 '진해구 여좌동의  주민자치 창업 프로그램'과 '평지마을 빈집 활용 프로그램'을 계속 지원하고 있다.

“진해구는 군항제라는 축제가 열리고 해군기지가 자리 잡아 주말에 외출·외박을 나오는 군인들과 이들을 만나러온 친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역에 인프라가 없다보니 더 도심화된 곳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갑니다.”

이 대표는 “마을은 점점 쇠퇴하고 낙후돼 가는데 이런 현상은 비단 진해만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지역들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해구 여좌동에는 60여 채의 빈집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문도시건축은 이 빈집들을 리모델링해 마을의 활기를 되찾고 주민들이 지속가능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창업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여좌동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엮어 만든 책

벚꽃길 산쪽에 위치한 평지마을도 빈집들이 많아 휑하긴 마찬가지다. 이 일대는 지혜의 숲이라는 편백나무 숲이 있고 등산객도 오지만 손님을 끌만한 제대로 된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없다. 조현정 대표는 “우선 평지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자치활동을 펼 수 있는 공유공간을 만들었다고 들었다.”며 “주민들이 직접 이 곳을 기반으로 지역의 문화와 역사, 인물들에 대한 조사 연구 과정을 아카이빙해나갈 계획이다”고 전했다.

 

“도시 재생이 자본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 되기 위해선 실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변화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참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도시재생이란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얼마나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건강하게 재조직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들은 좋은 건축이란 사회·문화·경제·환경이 서로 통합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서로 다른 분야들이 연계해 협력하는 통합된 도시건축플랫폼을 지향한다.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친환경 모듈주택 연구

지문건축이 관심을 쏟는 또 하나의 분야는 모듈주택이다. 모듈주택은 기술융합형 이동식 건축물로 경제성과 내구성, 환경성을 갖춘 게 특징이다. 구성재의 표준화와 부품화로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고 소량화와 경량화로 설치와 해체가 용이하다.

 

“ 현대사회는 이사가 잦고 주거 문화도 다양해져 한 곳에 평생 사는 경우가 드뭅니다. 이동식 건축이 가능한 모듈주택은 목돈 마련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소형주택으로 접근할 수 있고 작은 단위의 리모델링 대안으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지문도시건축은 이동식 주택 전문기업인 테라플랜과 협업을 통해 상품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 환경에 이로운 건축재를 만들기 위해 대마 등 자연 재료를 활용한 건축재 연구와 개발을 진행 중이다.

 

“땅 위에 쓰는 이야기”... 주인공은 ‘사람’

조현정 대표는 세계 각국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건축과 건축가의 역할을 고민하는 끄라떼르 흙건축연구소에서 흙건축 및 지역기반건축을 공부했다. 친환경 건축과 더불어 그의 관심사는 문화유산의 현재화와 일상화를 통한 지속가능화이다.

 

인도네시아 토라자 지역의 토속 건축물인 통코난은 상승감이 강조된 지붕 선과 이색적인 외벽 장식으로 유명하다. (사진제공=지문도시건축)

그는 지난 8월 ㈜테라픽스와 협업으로 인도네시아 토라자 지역의 토속 건축물인 통코난(Tongkonan) 아카이빙 조사단에 참여해 건축물을 도면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10월에는 전라남도 해양권역 섬문화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관련된 워크숍에 참여했다.

 

“한국에선 전통이 지속된다는 걸 일상에서 만나기 힘듭니다. 우리의 고유한 것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젊은 세대들은 거리감을 느낍니다. 가치들도 변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다시 만나 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데,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대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조 대표에게선 ‘건축가 없는 건축’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조현정 대표는 사회주택과 도시재생, 세계문화유산 아카이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전통주거양식을 돌아보게 되면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거기엔 건축가가 존재하지 않아요. 오랜시간 그 땅에 맞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건축에 구현된 겁니다. 때론 그런 것들이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현대사회는 그 맥락이 전혀 다르지만, 환경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대표는 ‘르 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를 입에 올렸다. 그는 현대식 아파트를 창시한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사회주택 리모델링 설계 작업에 한창인 이승한 공동대표

 

“아파트가 과연 좋은 주거 형태인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살았던 시기는 산업화로 도심에 몰려든 인구를 수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런 시대적 상황을 건축가로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해결책을 마련한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지문도시건축에서 지문이란 ‘바탕글’ “땅위에 쓰는 이야기‘란 뜻이란다. 건축의 공공성을 중시하는 세 건축사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사람'이었다.

사진. 이우기(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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