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가 되면 몸이 바쁘고 덩달아 마음도 바빠진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직하고 실업급여를 신청한 마당에 뭐 그리 바쁠 게 있나.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지경이다.

아무튼 몇 해 전부터 12월이 되면 이런저런 송년모임에 나 자신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생일까지 겹쳐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때로는 생일을 명분삼아 오래 못 보았던 친구들을 불러 밥 한 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한 장 남은 달력의 숫자마다 동그라미가 빼곡하게 들어찬다. 

사실, 이 모든 다망함은 SNS 탓이다. 특히 페이스북. 나는 잊고 있어도 때가 되면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오늘이 손아무개 씨 생일이라는군요.’하고 천연덕스럽게 알려주니 친구가 된 도리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담벼락으로 달려와 축하폭탄을 투척하고 가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그렇지 않아도 정신 사나운 나날을 버겁게 살아내는 이들에게 어쩐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올해는 일찌감치 생일 알림 기능을 OFF로 해두고 슬그머니 지나치려 했는데 아뿔싸, 페이스북의 고요한 생일맞이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순간 카카오톡이 더 우렁찬 알림으로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이런, 이런….

별 수 없이 페이스북에 자수했다. 축하해준 이들에게 짧은 감사의 글을 올렸고 지난해와 똑같은 축하세례에 시달리는 중이다. 과분하게도 각각 다른 친구들이 만들어준 두 번의 생일상을 받았고 또 하나의 생일상을 받기 위해 대구를 향해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 글을 쓴다. 

생일상 받는 게 무슨 대수라고 시시콜콜 이런 글을 쓰나? 맞다. 이거, 그냥 자랑질이다. 뭐 하나 대수로울 게 없는 삶이라서 이렇게 시시콜콜한 즐거움들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런 소소한 행복마저 마음껏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다. 봉오리를 펴지도 못한 어린 꽃이 또 떨어졌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젊은 목숨 스러진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똑같은 인재(人災)가 발생했다.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 사고는 어쩔 수 없는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노동자의 안전까지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가 초래한 사고다. 그 뒤에는 인륜을 외면하고 이윤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시장자본주의의 검은 손이 도사리고 있다. 사고현장을 찾았던 피해자의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인간이 배려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언제까지 피해자들의 안전부주의로 진실을 호도할 건가.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우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실현될까. 이미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로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구조를 바꿔야 한다. 사람 위에 이윤의 극대화를 올려두는 시장자본주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림없는 일이다. 애도의 졸시 한 편 남긴다.

먼 별을 위한 기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 마을공원 축대 위에서 / 한 끼의 시간 서성거리는 / 고양이들의 밤, 격정의 바람은 / 성마른 울음으로 우우우 / 키 큰 소나무 사이를 내달리고 / 벌레소리마저 삼킨 수풀은 / 그저 검푸른 무덤의 적막뿐 / 살아남은 자의 몫은 오직 / 흐린 달빛 살펴 걷는 그림자 / 그래도 아직은 견딜 수 있다는 / 살얼음판 위의 믿음으로 / 고개 들어 먼 별 헤아린다

원죄도 없이 얼어붙은, 얼어 붙박인 눈물들

슬프고 – 맥이 풀리다가 -- 화가 나고 --- 다시 슬프고 - 맥이 풀리다가 -- 화가 나는 --- 스러진 꽃잎들은 - 결코 -- 의도하지 않았을 --- 이 기괴한 무한루프의 세상 벗어나기를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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