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아래 첫 마을. 오름과 내려감을 반복하는 해방촌 가파른 골목길에는 요즘 두 세상이 공존한다. 젊음과 개성 넘치는 카페와 상점들 사이로, 허름하지만 아기자기한 양옥집이 즐비하다. 그 집들 가운데는 한때 해방촌의 경제를 떠맡았던 니트 공장들이 있다. 아래층에서는 기계가 돌아가고 위층은 살림집인 형태들이다.
해방촌은 광복 이후 귀국한 동포들과 월남한 실향민, 한국전쟁 때 피난민 등이 임시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한국니트 생산의 발상지로 손꼽힌다. 호황기 때인 7080시대에는 300여 개의 니트 공장이 주택가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1/6 수준인 50여 곳으로 줄었다. 그 많던 니트 공장은 어디로 간 걸까.
니트 생산기지의 상당수는 중국,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인건비가 싼 제3국으로 이전됐다. 여기에 빠른 유행을 좇아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지는 스파(SPA) 브랜드의 등장으로 해방촌의 니트 산업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공장이 하나둘 폐쇄되고 경제가 팍팍해지니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났다. 1970년대 2만 6,000여 명에 달했던 해방촌 인구 수는 2018년 7월 현재 1만 800여 명으로 줄었다.
니트 패션의 영광... 협동조합으로 되살려볼까
쇠퇴일로를 겪던 해방촌에도 2016년에서 2020년까지 국토부와 서울시가 ‘해방촌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총 사업비 100억 원 규모의 마중물 사업이 8개 시행되는데 이중 하나가 ‘공방·니트산업 특성화 지원’ 사업이다.
이 사업에 힘입어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니트산업 종사자들은 올해 5월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을 설립하고 협동이란 이름으로 뭉쳤다.
" 먹고는 살아야하잖아요. 공동으로 하면 좀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이 산업이 활성화되지 않을가 싶어서요. 개인이 할 수 없는 일도 뭉치면 하다못해 단체복 수주라도 쉽지 않겠어요? 보다 많은 일을 끌어와 공동으로 작업하면 상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호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이사장) |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9명이다. 이 가운데 7명이 니트업계 사장이다. 이들은 공동 수주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조합원 출자금으로 신흥시장 안에 공동판매장 부지를 마련했다.
공동판매장은 1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은 쇼룸을 조성해 전시장 겸 오프라인 판매장으로 활용하고, 2층은 바이어와의 상담실 겸 조합회의실로 쓸 계획이다.
" 도시재생은 물리적 환경만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사회,문화 등 전방위적 부문에서 지역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해방촌의 역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니트산업이 활성화되면 지역 일자리가 늘어나는 데 기여하리라 봅니다." (이한솔 사회적경제 자문계획가) |
지역의 기업·산학협력으로 젊은 기술 인력 양성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에는 의류 생산 과정에서 버려지는 자투리 원단으로 업사이클링 용품을 만드는 소셜벤처 '니들앤코(Needlenco)‘가 함께하고 있다. 니들앤코는 해방촌 니트 패션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2016년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새로운 젊은 기술인력의 유입이 시급한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해방촌 니트산업 종사자들의 평균 연령대는 50~60대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오랜 경험과 뛰어난 기술력은 장점으로 꼽히지만 젊은 층의 수요를 잡는 데는 버거운 상황이다. 이를 위해 협동조합은 지역 공방, 예술가, 사회적경제 기업 등과의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또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니트학과가 개설된 한양여자대학과 산학협력으로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전략이다.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들은 수십 년간 이 업종에 몸담아 온 사람들이라 기술력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우리는 기획과 디자인 개발 분야에서 협업을 구상 중입니다. 우리의 기술과 젊은 청년들의 아이디어가 만난다면 시너지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
이 밖에 산업연수생 프로그램과 이주여성 기술 교육 및 취업 연계 등을 통해 폭넓은 인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고용의 질을 높여 인력난을 해소하고 일자리 창출
니트산업은 대표적으로 비수기와 성수기가 구분된다. 문제는 경기 침체로 비수기의 기간이 점점 길어짐에 따라 고용이 불안정해져 해방촌 니트 공장의 비정규직 고용비율은 70%에 달한다. 고용의 불안정화는 인력수급에 차질을 빚어 사업 수주에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 올해는 특히 경기 침체가 심합니다. 아주 바쁜 시기가 가을부터 1월 말까지는 이어져야 하는데 올해는 10월 말로 끝난 듯 합니다. 성수기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종업원들 월급 주고 1년을 버텨내야 하는데 말이죠. 비수기를 견뎌내기 위해선 단순한 주문생산에서 벗어나 공동브랜드를 갖고 디자인부터 판매까지 아우르는 시스템으로 지속적인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정수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 이사) |
니들앤코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해방촌은 원사 구매부터 편직(실로 원단을 짜는 공정), 가공 등 전 공정을 소화하는 업체가 20%가량이며 80%는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을 기반으로 주문받은 제품을 생산하는 형태다. 따라서 디자인과 기획의 협업만 잘 이뤄진다면 니트 생산의 전 과정이 해방촌 안에서 일어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서는 사후서비스(A/S)가 어렵지만 바로바로 대처 가능하고, 밤사이 물건을 다 팔고 다음 날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받아볼 수 있을 만큼 신속하다는 점에 우리의 경쟁력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이 같은 장점을 살려 공동브랜드를 만들고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비수기를 최소한으로 단축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통해 비수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일터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니트패션협동조합은 온라인 플랫폼 준비에 앞서 실험적인 단계로 '오마이컴퍼니'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용산 사회적경제생태계조성사업단’이 지원했다.
김 이사장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해방촌니트협동조합의 존재를 알리고 조합이 어떤 일들을 해나가려고 하는지, 왜 해방촌에서 니트 사업이 존속돼야 하는지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고 설명했다. 또한 “니트 산업은 특성상 하나의 공장에서 파생되는 일이 사슬처럼 연계돼 있기 때문에, 공장이 하나 망하면 거기에 딸린 많은 일자리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린다”고 덧붙였다.
“동네 활성화 잘했다”... 그 이야기 들으면 성공
김 이사장은 15살 때부터 니트 기술을 배워 한 우물을 판 덕분에 30대에 해방촌에 니트 공장을 세웠고, 3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다. 여기에 남겨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처럼 평생을 이 업에 바친 사람들이다.
해방촌 니트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의 차별성을 묻자 “뭐든지 보자마자 다 해낼 수 있는 기술이면 되지 않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디자이너가 달랑 그림 한 장만 갖고 와도 원하는 물건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고, 한눈에 편직과 원사 종류를 구분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우린 규모화를 지향하지만 소량생산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라진다면 누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그는 절박함이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조합원 각자가 업계 대표로 수십 년을 살아온 탓에 공동의 목표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래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무엇이든 되는 방향으로 나가보자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돼야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고요.” |
숱한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니트협동조합 덕분에 ‘돈 잘 벌고 동네가 활기 넘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김 이사장은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해방촌의 가파른 골목길을 떠났다. 오름과 내림의 연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방촌의 좁은 골목길은 해방촌 니트산업의 어제와 오늘을 보는 듯했다. 해방촌니트패션협동조합은 각자도생에서 벗어나 협동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돼 니트 산업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사진. 이우기(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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