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닳아빠진 노란색 양은냄비라야 한다. 뚜껑 위의 검은 꼭지를 잡고 들어 올려 뒤집는다. 그 위에 막 끓여낸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올려놓고 푸르륵, 푸르륵 여물 먹는 말처럼 소리도 요란하게 먹는다. 아니, 먹는다는 표현보다는 흡입한다는 말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푸르륵, 푸르륵.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년 류장하 감독, 최민식 주연)’에서 음악선생이 그의 퀴퀴한 자취방에서 중학생 제자와 함께 라면 먹는 장면을 떠올리고 다시 그 안에서 소실점을 따라 멀리멀리 들어가, 1980년 초 강화도를 전전했던 고수머리 청년이 화도의 자취방에서 이동식 가스레인지에 노란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이는 장면으로 이동한다.

암벽에 깊숙이 새겨진 그림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모습, 맞다. 꼭 그렇게 먹었다. 석 달이 넘는 기간을, 곁들인 김치 한쪽 없이 질리지도 않고 잘 먹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또렷하게 재생된다.

먹먹하다면 먹먹하고 그립다면 그립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씁쓸하고 불편한 그 기억을 끄집어내게 만든 건 한 권의 책이다. ‘네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전제로, 이 나라의 좋은 소설가를 꼽아보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열 손가락 안에 꼽아줘야 할 소설가 하창수의 잡문집(? 사실,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 하창수 만큼 출중한 재능을 보여주는 작가가 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압도적인 책읽기를 통해 구축한 방대한 지식으로 그림, 한시, 붓글씨들을 엮어 써내는 글들을 보면 이런 작가의 소설이 왜 서점가의 눈에 띄는 매대 위에 놓이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이 그만한 역작이고 노작이란 얘기다. 라면에 관한 시시콜콜, 잡학사전 같은 책인 줄로만 알고 뒤적거리다가 프롤로그에서 김현 선생의 라면이야기를 보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찡, 했다. 

라면의 기원부터 현재까지, 라면의 모든 것을 총망라해 썼으니 라면 이야기가 틀림없으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문학부터 영화까지 많은 문화예술에 깃든 라면의 일화를 꼬불꼬불 풀어낸 인문학이다. 

일단, 재미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당대의 스타들이 라면 곁에 얼쩡거렸다는 이유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온다. 우유 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배가 고플 때는 라면을 먹고 달렸다는 아시아육상 중거리의 신화 임춘애가 보이고 최민식, 송강호, 하정우 등 한국영화의 빅스타들이 삶의 곡진한 허기를 드러내는가 하면 아기자기한 일본영화 속 라멘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돼지뼈국물처럼 섞여든다.

초등시절 무협소설로만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완성한 무협광 시인은 영화 ‘와호장룡’을 더 좋아하지만 어쨌든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도 등장한다. 영화만 불러들인 게 아니다. 

젊은 시절 기행으로 유명했던 소설가 이외수 선생과 단짝 최돈선 시인이 춘천교대 시절 끓여먹던 연탄난로 라면, 아내와 헤어지는 바람에 다채로운 라면요리의 달인이 됐다는 조현석 시인, 인스턴트식품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우아한 피아니스트 유니스황의 라면이야기도 눈에 띄는데 어디서 그렇게 흥미로운 정보들을 캐냈는지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이 재미로만 끝난다면 아마 저자는 하창수가 아닐 것이다. 그는 에필로그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추억에는 라면 하나를 온전히 먹고 싶었지만 늘 국수를 함께 넣고 끓여주시던 어머니의 ‘안쓰러움’이 있다. 

이 도저한 ‘인간학’, 서늘한 ‘존재론’을 과학만으로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쉽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지금, 라면에 깃든 눈물과 아쉬움은 한낱 신파에 불과하겠지만, 이 신파마저 과학이 감당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라면은, 어쩔 수 없이, 철학의 안에, 인문학의 범주 안에 넣어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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