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별세, △△ 교수 모친상=□일 A병원 발인 ◎일 오전. 연락처 02-1234-5678” 신문을 읽다가 한 켠에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부고 기사를 본 적이 있나요?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 언론의 부고 기사들은 매일 지면을 할애해 망인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 중에도 뉴욕타임즈는 그동안 백인 남성에 대한 부고가 대부분이었다며 2018년 3월부터 ‘간과했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Overlooked)’라는 부고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운넷은 이를 참고해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이 나라의 교육받은 남성 100명의 중 99명은 여성 교육과 사회 진출에 반대한다. 여성에게서 쌀알만큼이라도 작은 잘못이 발견되면 태산만큼 부풀려 인격을 짓밟으려 한다. (In ninety-nine cases out of a hundred the educated men of this country are opposed to female education and the proper position of women. If they observe the slightest fault, they magnify the grain of mustard-seed into a mountain, and try to ruin the character of a woman.)”

19세기 인도, 여성은 ‘남편의 허락’ 아래에서나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던 시절,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여성 판디타 라마바이 사라스와티(Pandita Ramabai Saraswati)의 발언이다. 1882년 인도에 처음으로 정부 교육위원회가 만들어지던 자리에서 판디타는 여성 교육권을 억압하려는 사회를 비난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살이었다.

판디타는 '라마 동그레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인도 방방곡곡에서 시를 낭송하며 '판디타 라마바이 사라스와티'라는 이름을 얻었다.

판디타는 1858년 4월 23일, ‘라마 동그레(Rama Dongre)’라는 이름으로 브라만 계급 가문에서 태어났다. 브라만 계급은 인도 카스트제의 가장 최상층으로, 성직자와 학자로 구성돼있다. 당시 사회는 교육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하고 여성은 어릴 때 결혼시키는 문화가 있었지만, 학자였던 판디타의 아버지는 딸을 일찍 결혼시키지 않고 집에서 고대 인도의 신성 언어인 산스크리트어(Sanskrit)를 딸에게 가르쳐주었다. 판디타가 대부분의 인도 여성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계기였던 셈이다.

판디타는 16살 되던 해 불어 닥친 대기근에 부모를 잃었다. 살아남은 판디타와 오빠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힌두교 경전들을 외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판디타는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유창하게 낭송하는 보기 드문 소녀였고 그의 오빠 역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주목받을 수 있었다. 1878년 캘커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더 유명해졌다. 이 때 캘커타 대학교의 학자들이 판디타에게 여성 학자라는 의미를 담은 ‘판디타’와 지혜의 여신이라는 의미를 담은 ‘사라스와티’라는 호칭을 붙여줬다. 

1880년 오빠가 죽은 뒤 판디타는 젊은 변호사 비핀 베하리 메다비(Bipin Behari Medhavi)와 결혼했다. 메다비는 카스트 제도 계급의 하층인 수드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인도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난 직후 메다비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판디다는 당시 남편을 잃은 브라만 계급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에 대해 “브라만 여성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두려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즈(NYT)에 의하면 브라만 사회는 이들에게 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삭발해야 했으며, 칙칙하고 거친 옷을 입어야 했고, 적은 음식으로 근근이 연명해야 했다. 이들은 또한 지속적으로 육체적,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됐다. 어린 시절에 결혼한 여성 중 남편을 일찍 잃은 소녀들은 삶에서 남은 몇 십 년을 이렇게 살아가야 했다.

판디타는 직접 기독교로 전향해 이런 억압에서 벗어났다. 1883년 그는 영국으로 떠나 세례를 받고 ‘메리(Mary)’라는 이름을 얻었다. 종교 전향으로 많은 인도인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여전히 인도 옷을 입고 채식주의자로 지내면서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

판디타의 책 '브라만 계급의 힌두 여성들(The High Caste Hindu Woman)'은
여성들이 힌두 사회에서 놓인 위치를 설명했다.

그는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뒤 1887년 '브라만 계급의 힌두 여성들(The High Caste Hindu Woman)'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높은 계급의 인도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삶에 얼마나 억압과 차별이 가득한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담았다.

2년 뒤 인도로 돌아온 판디타는 각종 후원으로 ‘배움의 집(Sharada Sadan)’을 설립해 남편을 잃은 여성들의 피난처가 되게 했다. 판디타는 그들에게 안전하게 살 장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읽고 쓰는 법과 다양한 지식을 가르쳤다. 배움의 집은 인도에서 처음으로 과부와 미혼 여성에게 공식 학교 교육과 직업 훈련을 받게 한 조직이었다. 배움의 집은 지금도 운영되는 중이다.

판디타는 1922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딸이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던 다음 해였다. NYT에 의하면 판디타는 가부장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독교로 전환했기 때문에 인도 주류 역사책에서 지워졌다. 

판디타는 여러 저서에서 행복의 주된 요소로 '완전한 독립'을 꼽았다. 그가 여성들에게 '파괴 불가능한 자산'인 교육을 강조했던 이유다.

자료출처:
https://www.nytimes.com/2018/11/14/obituaries/pandita-ramabai-overlooked.html
https://feminisminindia.com/2017/03/28/pandita-ramabai-essay/
http://www.bu.edu/missiology/ramabai-dongre-medhavi/
https://www.womensweb.in/articles/high-caste-hindu-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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