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의 시간들' 스틸 이미지.

뉴스만 틀면 서울 아파트 가격이 연일 고공행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입이 떡 벌어지는 집값을 들을 때마다 ‘나는 평생 서울에 집 한 채 갖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부동산 소유를 삶의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는 한국 사회에서 ‘집’은 자산의 대상이자 투자의 수단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서울 끝자락에 위치한 둔촌동 주공아파트 주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집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이 담겨 있다. 오는 25일 개봉을 앞둔 영화 ‘집의 시간들(감독 라야)’은 1980년 3월 입주해 올해로 39살이 된, 곧 재개발 때문에 없어질 아파트 단지가 품고 있는 오랜 기억들을 풀어낸다.

스크린이 오르면 카메라는 어느 가정의 소박한 거실부터 비춘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나무 몇 그루만 제외하면 소파, 에어컨, 책상, 의자, 화분 등이 놓인 평범한 풍경이다. 이곳에서 28년을 보낸 주민은 “이 아파트로 돈을 많이 벌진 못했지만,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해준 고마운 우리집, 그야말로 ‘홈타운’ 같은 곳”이라고 나지막이 소개한다.

영화 '집의 시간들' 스틸 이미지.

‘집의 시간들’은 다른 사람의 집을 찾아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가정방문’ 프로젝트와 사라져가는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가 만나 제작된 다큐멘터리다. 재건축을 앞둔 이곳에 사는 실제 주민 13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진솔한 사연들과 아파트 단지의 다채로운 풍경을 담은 영상이 감각적으로 버무려져 있다.

어떤 주민은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했고, 또 다른 주민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가정을 꾸려 또 다시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사람과 집의 관계가 참 중요한데,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집 덕분에 생활이 안정됐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어느 동네, 한 주택에서 1살부터 21살까지 20년을 살아온 나 또한 집을 향한 특별한 마음에 백번 공감했다. 아이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모든 순간을 함께해온 집에 대한 추억을 떠오르면, 애틋하고 고맙고 따뜻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집도 나와 같이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저기 고장 나고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이사를 갈 때 아쉬움에 한참을 울었던 기억도 있다. 

영화 '집의 시간들' 스틸 이미지.

한 집에서 오래 살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 같이 보내는 절대적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애틋함도 적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둔촌주공 주민들 역시 떠나기 전 “다른 집에서 지금처럼 마음 놓고 살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헐리지 않는다면 계속 머물고 싶지만, 불혹 나이에 가까워진 아파트는 너무 낡아버렸다. 겨울에는 외풍을 막지 못해 추위를 고스란히 느껴야 하고, 오래된 배관은 시뻘건 녹물을 뿜어내기도 한다. 

주민들은 앞으로 재건축될 아파트가 “삐까뻔쩍한 대리석이나 인공적인 조명이나 조경 말고, 지금처럼 자연과 조화되는 집이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새롭게 지어질 아파트가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의 ‘둔촌주공아파트’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집의 시간들’은 집값 폭등, 부동산 대란 속 ‘내집 마련’을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집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재산과 투자의 수단으로만 여겼던 ‘집’이 나와 가족, 이웃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제공.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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