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고 1천달러를 주시오” 볼테린 드 클레어의 도전
“나를 죽이고 1천달러를 주시오” 볼테린 드 클레어의 도전
  • 박유진 객원 기자
  • 승인 2018.10.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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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외면한 사람들] ⑦ 모든 외부 권력 거부...19세부터 ‘자유사상’ 강의한 무정부주의자
상원의원에 편지..."1천 달러 받아 대통령도, 암살범도, 거지도 없는 사회 조성에 쓸터"
“○○씨 별세, △△ 교수 모친상=□일 A병원 발인 ◎일 오전. 연락처 02-1234-5678”
신문을 읽다가 한 켠에 이렇게 한 줄로 끝나는 부고 기사를 본 적이 있나요?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 언론의 부고 기사들은 매일 지면을 할애해 망인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 중에도 뉴욕타임즈는 그동안 백인 남성에 대한 부고가 대부분이었다며 2018년 3월부터 ‘간과했지만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Overlooked)’라는 부고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운넷은 이를 참고해 재조명이 필요한 인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무정부주의자를 죽이면 1천 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

1902년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조셉 하울리가 선언했다. 당시 윌리엄 맥킨리 미 대통령이 어느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당해 반무정부주의 정서가 사회에 퍼져있던 상황이었다.

얼마 후 하울리 상원의원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아래 적힌 우리 집 주소로 와서 직접 나를 죽이고 돈을 아껴라.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원하는 거리에서 나를 쏴라. 당신의 장사꾼 본능이라면 끌리는 제안이 아닌가? 1천 달러라는 대가를 누군가에게 줘야만 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나를 죽일 기회를 준 것이므로 나는 그 돈을 받아 암살범도, 대통령도, 거지도, 상원의원도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선전하는 데 쓸 것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미국인 무정부주의자이자 자유사상가 볼테린 드 클레어(Voltairine de Cleyre)였다. ‘자유사상(Free Thought)’은 전통적인 종교·사회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상이다. 드 클레어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 때부터 자유사상에 대해 강의와 집필 활동을 했다.

볼테린 드 클레어는 강요된 모든 질서에 저항했다.
볼테린 드 클레어는 강요된 모든 질서에 저항했다.

드 클레어는 1866년 11월 17일 미시간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딸에게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의 이름을 따서 ‘볼테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으며, 어머니는 뉴욕주 노예 폐지론자 가족 출신이었다. 드 클레어는 이에 대해 “내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부정하는 성격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자신의 에세이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과정(The Making of an Anarchist)’에서 말했다.

그는 어릴 적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3년을 지냈는데, 학교는 믿음과 복종을 강요했다. 에세이에 따르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잘못했다’고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드 클레어에게 선생은 “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높은 존재에게는 항상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드 클레어는 순응을 거부했고, 학교는 그를 문제아로 취급했다. 그가 질서와 교리에 뿌리 깊은 반감을 갖게 된 이유다.

1886년 5월 15일 미국 정치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그려진 삽화. 헤이마켓 사건을 다뤘다.
1886년 5월 15일 미국 정치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그려진 삽화. 헤이마켓 사건을 다뤘다.

1886년 5월 3일, 훗날 뉴욕타임즈(NYT)가 “드 클레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한 사건이 터졌다. 미국 노동절(May Day) 제정의 유래가 된 ‘헤이마켓 사건(Haymarket affair)’이다. 시카고에서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 주변에서 총파업 집회를 열었는데, 시카고 경찰들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폭탄을 던져 경찰관 7명이 죽었고, 무정부주의자 8명이 체포됐다. 그 장소에 없던 사람들도 6명 포함돼있었다. 4명이 교수형을 당했으며, 1명이 자살했다.

소식을 듣고 공권력에 분노한 드 클레어는 무정부주의를 열정적,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 반복해서 글을 썼으며 매년 헤이마켓 사건 기념일에 대표 발언을 했다. 이후 그는 1892년 ‘여성 자유 연맹’을 설립해 성, 금지법,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혁명 등의 주제로 토론했다. 유대인 무정부주의자 하임 와인버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여성 자유 연맹이 영어를 사용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이는 주요 장소가 됐다고 서술했다.

드 클레어는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삶의 방식도 거부했다. 그는 남편과 아들이 있었지만, 어머니 혹은 아내에게 전형적으로 주어지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떠났다. 또한, 필라델피아에서 진행했던 강연에서 “여성은 스스로에게 ‘나는 왜 남성의 노예인가,’ ‘나는 왜 동료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테린 드 클레어가 죽고 난 며칠 후, 그를 기리는 행사를 알렸던 전단지
볼테린 드 클레어가 죽고 난 며칠 후, 그를 기리는 행사를 알렸던 전단지

평소 건강하지 못했던 드 클레어는 1912년 4월 17일,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패혈성 수막염이 원인이었다. 그는 죽기 전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하늘과 땅의 어떤 통치자에게도 충성할 의무 없이 무정부주의자이자 자유로운 영혼으로 죽는다(I die, as I have lived, a free spirit, an Anarchist, owing no allegiance to rulers, heavenly or earthly)”고 말했다.

죽은 후 그는 50년 이상 점점 잊히다가 사회적으로 여성 운동이 재개되면서 그가 집필한 글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NYT는 동시대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던 엠마 골드만의 말을 인용해 “드 클레어는 자유를 사랑하는 예술가이자 미국 최고의 여성 무정부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자료출처:
https://www.nytimes.com/2018/09/26/obituaries/voltairine-de-cleyre-overlooked.html
http://theanarchistlibrary.org/library/voltairine-de-cleyre-the-making-of-an-anarchist
https://c4ss.org/content/42786
https://www.peoplesworld.org/article/this-week-in-history-radical-feminist-voltairine-de-cleyre-b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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