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번은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난다. 봄, 가을이 라이딩하기에 좋다. 언제부턴가 덥고 긴 여름과 춥고 긴 겨울만 남게 되어 택일은 꽤나 어려워졌다. 상반기 호시절엔 이사가 겹치고 평년보다 비가 잦아 떠나질 못했다. 여름은 호들갑스럽게 뜨거웠다. 9월 첫 주가 지나고 내린 비에 날씨가 급변했다.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스몄다. 서둘러 열흘간의 여행 일정을 짰다. 이번에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까지 들어가기에 팔도를 다 걸치는 편애 없는 여행이다. 각 지역의 숙소와 배편까지 완벽하게 예약을 마쳤다. 여행 중 준비 없이 비를 몇 번 맞은 적이 있는 터라 이번에는 날씨 변화에도 철저히 대비했다. 떠나는 날 일기가 불안정한 것을 빼면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연희동 집을 떠나 첫날 광주까지 가는 것이 가장 긴 코스였다. 국도로 쉬엄쉬엄 달리면 여유롭게 풍광도 즐기겠지만, 목표지점의 거리가 먼 경우에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해서 보상받자는 심리일 텐데 이러다 보니 광주까지 가는 길은 다소 전투적이었다. 차보다 빠르게 출발하고 더 빨리 달렸다. 기름통에 남은 것이 많지 않아 약간의 휴식도 취할 겸 주유소에 들어섰다. “아저씨 가득 채워주세요!” 주유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는데 분명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사라졌다. 신나게 달릴 때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몇 시간을 달렸는데 그게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첫 낭패였다. 그나마 전화기가 있어 그 자리에서 이체를 해주었다. 하지만 물을 사서 마실 수는 없었다. 갈증이 얄궂게 찾아왔다.

광주에선 비엔날레를 관람했다. 올해로 12회째를 맞지만, 매번 실망이 크다. 건성으로 보고 나와 목포로 향했다. 이미 해가 떨어진 시간이고, 바람은 차가웠다. 논길을 달릴 때면 어김없이 벌레들이 날아들었다. 헬멧과 고글, 옷에서 연신 벌레들이 화려하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초록색 잉크가 가득 든 콩알만 한 풍선이 날아와 내 얼굴에서 터지는 모습은 어느 쪽이든 처절하다.

배에 모터사이클을 싣고 제주에 도착해서 처음 찾은 곳은 요조의 책방 무사였다. 요조와 그의 동무 종수씨가 반겨줄 것을 기대했지만 요조는 서울 출타 중. 주섬주섬 쓰레기라는 잡지를 사서 서둘러 나왔다. 문득 나는 책방 무사를 찾은 건가 요조를 찾은 건가 헷갈렸지만 어쨌든 와서 좋았다. 또 기회가 오겠지. 그리고 애월에 있는 책방 디어마이블루로 향할 때 제주에서 가장 멋진 일몰을 목격했다. 자연. 이게 자연이 주는 낯선 감동이지 속으로 생각하며 늦은 시간 도착했더니, 프라하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정신을 놓고 있는 권희진 대표가 커피믹스를 내놓는다. 이런 건 어디서든 먹을 수 있잖아. 속으로 생각하며 맛있게 받아먹었다. 공짜는 다 맛있다. 다음 날 저녁 제주 별곶을 찾았다.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가 운영하는 과학문화공간이다. 숱하게 제주를 찾았지만 단 한 번도 쏟아지는 별을 본 기억이 없다. 천체망원경의 힘이라도 빌려보자는 거였지만 이날도 역시 구름이 잔뜩 끼었다.

제주를 떠나 여수에 도착했고 통영과 부산을 거치며 정은영 대표가 운영하는 봄날의 책방과 유진목 시인의 손목서가를 거쳤다.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쉬고 있으면 주변 아저씨들이 모여 차량을 구경한다. 그들에게도 로망일 거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라는 판박이 같은 이유로 시도조차 못 해보고 있는 거 다 안다. 그러면서도 궁금한 것은 정말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답하기 싫은 대표적인 질문은 이거다. “이런 건 얼마나 해요?”

안동의 고택에서 묵던 하루는 흐르는 천 주변에서 곤충 울음소리가 들리고, 풀 내음이 적당히 풍기도록 부슬비가 종일 내렸다. 이날은 어디도 안 나가고 방문을 열어 중정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이번 여행의 백미를 꼽으라면 이 순간일 거다. 계획된 여행 일정이 끝을 향하며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늘 그렇겠지만, 이번은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같은 여행이구나 싶었다. 잃었던 에너지를 자연으로부터 흡입하고 그 기운으로 다시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 여행이지. 아무렴.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제 소임을 다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던 찰라, 무언가가 쿵 하고 뒤를 받았다. 나는 그 충격에 차량과 함께 쓰러졌다. 주섬주섬 일어나 돌아보니 택시였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차량은 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려 테이프를 되감듯 빠르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열흘 같았던 시간은 사실 5분이었다. 했던 것 같은 일정들은 그저 계획이고 상상이었다. 그 멋진 일정을 시작하여 채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집에서 불과 300여 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결국,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여행을 계획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사고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야 할 열흘의 경험이 사라졌다. 나만 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닐 때가 제일 문제라고 출발 전날 선배 교수가 경고했을 때 콧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결국 이런 사달이 난 거다. 아무리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때는 자책하지 말고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정성껏 쌌던 짐을 푸는데 비실비실 헛웃음이 나왔다. 제기랄. 내게, 우리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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