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10년 동안  한 번도 뚜껑을 열지 않은 악기 상자가 있었다. 트럼펫이다. 그 상자를 볼 때마다 나에겐 좋은 추억보다는 씁쓸했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10년 전 큰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일이다. 음악선생님은 1인 1악기가 학교의 전통이라며 수업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각자에 맞는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상담을 거친 후 우리 애한테는 트럼펫이 배정됐다.

악기라곤 초등학교 때 동네 피아노 학원을 들락거려본 것이 전부였기에 이번에 제대로 배워보자며 부푼 기대를 안고 낙원동 악기 상가를 찾아 트럼펫을 샀다. 하지만 그 꿈이 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우리 애는 연주는커녕 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 악기는 반짝거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상자 속으로 들어가 10여년 동안 긴 잠에 빠져들었다.

몇 달 전 창고를 정리하다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쓴 상자를 발견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악기를 중고시장에 내다 팔아 푼돈이라도 챙겨 볼 요량으로 구글링을 하다가 한 편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복지법인 ‘ 함께걷는아이들’ 에서 2년째 진행하고 있는 악기 나눔 캠페인 ‘올키즈기프트(Allkidsgift)’ 의 사연이었다.

악기 나눔 캠페인은 저소득층 아이들이 이용하는 지역아동센터나 양육시설, 그룹홈, 쉼터 등에 기부 받은 악기를 깨끗이 수리하고 조율해 전달하는 활동이다. 아동복지 기관에서는 그 악기를 갖고 음악교육을 진행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접할 기회를 선물한다. 중고 악기를 새것처럼 수리하고 정기적인 조율과 점검을 해주는 임무는 ‘우리들의 낙원상가’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악기 상인들의 재능기부로 이뤄진다.

 

'함께걷는아이들'에 기증된 악기들. 이 악기들은 '우리들의 낙원상가' 장인들의 수리와 조율을 거쳐 문화소외계층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악기를 기부하러 ‘함께걷는아이들’을 찾아갔을 때 사회복지사로 10년 넘게 잔뼈가 굵은 유원선 사무국장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 누군가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여 주는 것이 사치라고 할지 모르지만 고개를 늘 땅으로 향하던 아이들이 차츰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발랄함을 되찾았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다.

지난 주 난 반가운 이멜을 한 통 받았다. 후원자님이 기부한 트럼펫이 ‘ 우리들의 낙원상가’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양주시 광적공립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전달됐다는 소식이다. 올키즈스트라 양주는 올해 오케스트라 사업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 아이들의 수에 비해 악기가 부족해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링크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트럼펫을 제공받은 아이들의 감사 편지글이 올라와 있었다. 삐뚤빼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정겹게 느껴지는 손편지였다.

악기를 기부하러 가던 날, 난 거의 십여 년 만에 상자 뚜껑을 열어보곤 민망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새것처럼 반짝였던 은빛 트럼펫이 어느덧 누렇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 속 트럼펫은 어느새 새것처럼 다시 반짝임을 회복했다.

트럼펫을 불고 있는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 나미야잡화점의 기적’ 에서 나오는 주인공 할아버지처럼 나도 훗날 그런 편지를 받고 싶다. 이 악기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바뀌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런 편지들이 집집마다 수북이 쌓여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꼭 악기가 아니어도 좋다.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편지들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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