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여름 어느 날 우편배달부로부터 누렇고 두툼한 서류봉투를 하나 받았다. 또 어디선가 보내온 문학관련 책이겠거니. 하고 봉투를 뜯어보니 각종 숙박시설과 교통편의 무료 제공 서비스를 꼼꼼하게 안내한 책자를 동봉한 여행 티켓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꽃다발 한번 받은 기억도 없이 심심한 내 생애에 제주도 여행도 아니고 달나라여행이라니!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아도 그건 틀림없는 달나라여행 티켓이었다. 그것도 무기한으로 무려 열한 개의 달을 순회하는 특별여행권이었다. 버럭 씨는, 고뇌의 고뇌를 거쳐 앵겔지수를 위협하지 않는 몇 가지 일을 빠르게 정리하고 여행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누군가에게 잡히고야 말 것이라는 표정으로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첫 번째, 달의 거리에서 버럭 씨는 놀랍게도 먼 과거의 자신과 마주쳤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시차를 두고 그런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계속 바뀐다는 거였다. 허름한 술집에서 만난 버럭 씨의 과거는 이따금씩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버럭 씨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지치고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렇군. 버럭 씨는 깨달았다. 늘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해서 불행하다 생각해왔는데 그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이 현재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버럭 씨는 씁쓸한 에일 맥주 한 잔을 반도 비우지 못한 채 일어서서 과거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 내가 지금 그렇게 된 것처럼.”

세 번째는, 나는 달이다. 응? I am Moon이란인가. 버럭 씨는 생각했다. 우주의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다가 드디어 나의 근원이, 나의 자아가 달이었다는 진실에 닿게 된 건가? 그런데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 둘러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달은, 날아가는 달 즉, 비월(飛月)이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더 내딛은 버럭 씨는 다시 조금 더 흥분했다. ‘나는 달’은, 평소 아닌 척하고 살았으나 버럭 씨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무협(武俠)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되 엄연히 존재하는 강호(江湖). 풀잎을 딛고 바람처럼 달리며 주먹을 내질러 바위를 산산조각내고 칼을 휘둘러 천공의 달을 가르는 협성괴걸(俠聖怪傑)들의 종횡천하, 소설에서나 그렸던 무림(武林)의 세계가 실제로 펼쳐지다니.

세 번째 달의 마무리는 아련했다. 원수를 죽여 복수를 마친 뒤 남겨진 원수의 눈먼 딸을 데리고 심산유곡으로 떠나는 주인공은 또 다시 얼굴과 이름을 바꾼 버럭 씨 자신이었고 어린 원수의 딸을 끌어안고 운무 가득한 협곡으로 몸을 날리는 장면은 무협영화의 독보적 명작 ‘와호장룡(臥虎藏龍)의 마지막 장면과 그대로 겹쳤다.

버럭 씨는, 많은 사람들이 폭염으로 지옥의 한 철을 겪고 있을 때 은하열차를 타고 열한 개의 달을 순회했는데 미처 소개하지 못한, 두 번째부터 열한 번째까지 달의 에피소드를 모두 풀어내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곳에, 버럭 씨가 다녀온 달나라여행의 비밀을 특별히 공개한다.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열한 개의 달을 모두 돌고 오는 풀옵션 비용이, 놀라지 마시라. 단돈 13,000원이다. 신청할 곳은 <bookin>, 접속암호는 <달의연대기>.

이쯤 되면 대충 눈치들 채셨겠지. 맞다. 책 소개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의 재미를 만끽한 하창수의 단편소설집 <달의연대기>, 달과 관련된 소재로 쓴 단편소설 열하나를 묶어 냈다. 아, 이곳에 실린 짧은 글은 오직 버럭 씨의 경험담일 뿐 스포일러는 없다. 어느덧 불바다의 시절도 가고 소슬바람 불어오는 독서의 계절이다. 은하열차에 몸을 싣고 행복이라는 열한 개의 위성을 거느린 청춘의 행성으로 떠날 수 있는 가을여행, 날이면 날마다 오는 흔한 기회가 아니다. 놓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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