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는 쉽게, 운영은 투명하게, 사용은 내 의지대로'

지난 2015년 공익신탁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당시, 법무부가 배포한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공익신탁이란 기부를 원하는 사람(법인)이 자신의 재산을 ‘누군가’에게 맡기면, 그 ‘누군가’가 공익을 목적으로 기부 재산을 운용하는 신탁이다.

보도자료 제목 그대로 효과가 기대됐다. 기존에 공익사업 수단으로 주로 활용되던 공익법인은 설립 과정에서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고 설립등기 완료 등의 법적 실체 요건을 갖추는 데 수개월이 소요됐지만, 공익신탁은 법이 정한 요건만 갖추었다면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신탁계약만으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 제정 8년차인 지금, 기대와 달리 공익신탁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설립 개수 자체가 30여개에 불과하고 총 신탁재산도 100억원을 넘지 못했다. 세금 혜택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고 자금운용을 너무 엄격하게 규정하는 등의 이유가 작용했다. 좋은 일에 돈을 쓰려는 자산가들이 굳이 공익신탁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찾게 된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공익신탁을 활용해 사회적가치를 창출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시민들이 기부계획에 공익신탁을 활용하기도 하고 고액자산가들은 공익신탁을 이용해 미술관을 운영하기도 한다. 공익신탁이라는 제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활성화를 위해 꼼꼼히 분석하고 정비를 해야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공익신탁 기본구조/출처=법무부
공익신탁 기본구조/출처=법무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공익신탁

“저희도 기부자분들 만나서 기부 방법을 설명드릴 때, 꼭 공익신탁을 같이 넣어서 보여드리거든요. 근데 선택을 잘 안하세요" - 김아란 아름다운재단 나눔사업국국장

2015년 공익신탁법이 시행된 후 2022년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만들어진 공익신탁의 개수는 34개. 종료된 공익신탁 6개를 제외하면, 2022년 8월 기준 28개의 공익신탁만이 운영 중이다. 이들의 신탁재산은 약 84억원이다.

2020년 아름다운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부금 총액은 약 14.4조원이다. 국세청에 신고된 개인 기부금과 법인 기부금(기업 기부금) 통계를 재구성한 수치다. 같은 기간 새롭게 설정된 공익신탁의 규모는 약 1억원. 전체 기부금 통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미약하다.

그마저도 수탁자는 모두 금융기관이다. 이제까지 만들어진 34개의 공익신탁 중 2곳은 증권사 나머지 32곳은 은행이 수탁자였다. 당초 비영리단체는 물론 사회적기업 그리고 평범한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법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2022년 8월 기준, 법무부 공익신탁 공시시스템에 포함된 국내 공익신탁 현황. 종료된 공익신탁도 포함됐다/자료=법무부 공익신탁 공시 시스템, 디자인=정재훈 기자
2022년 8월 기준, 법무부 공익신탁 공시시스템에 포함된 국내 공익신탁 현황. 종료된 공익신탁도 포함됐다/자료=법무부 공익신탁 공시 시스템, 디자인=정재훈 기자

공익사업 못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자금 전달형 공익신탁 유도하는 제도

미국에서는 공익신탁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시민들은 공익신탁을 이용해 자본이득과 기부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자선잔여신탁(Charitable Remainder Trust: CRT)과 자선선행신탁(Charitable Lead Trust: CLT)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자의 차이는 기부를 먼저 하느냐 나중에 하느냐 일 뿐이다. 자산잔여신탁 기부자는 일정기간 동안 신탁자산의 수익을 돌려받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잔여자산 일체를 사회에 환원한다. 자산선행신탁은 반대다. 기부자는 일정기간 동안 기부를 먼저 하고 해당 기간이 종료되면 잔여자산을 자신이 갖는다.

자선활동은 물론 문화예술 분야에도 공익신탁이 활용되고 있다. '게티이미지(Getty Image)' 창업자 마크 게티의 할아버지인 폴 게티가 대표적인 사례다. 폴 게티는 공익신탁을 설정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후 해당 재산으로 미술관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주 LA에 위치한 '폴 게티 미술관'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하나의 공익신탁으로 기부와 자본이득은 커녕 부동산 소유 및 운영도 어려울 만큼 제도적으로 걸림돌이 너무 많다.

우선 세법 상 이슈다. 현행법은 공익신탁에 기부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공익신탁에 적용되는 세제혜택 요건정리/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디자인=정재훈 기자
공익신탁에 적용되는 세제혜택 요건정리/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디자인=정재훈 기자

소득세 규정을 살펴보자. 개인이 공익신탁에 기부한 후 세제상의 혜택(필요경비 산입, 세액 공제 등)을 받기 위해서는 4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①공익법인 등에 기부돼야 하며 ②신탁 설정후 계약해지나 원금 일부 반환은 불허하며 ③위탁자와 공익법인 등이 사이에 특수관계가 없고 ④금전으로 신탁해야 한다.

눈길을 끄는 건 1번과 4번이다. 법이 "세금 감면을 받고 싶으면 반드시 현금이나 예금으로 기부하고 그 돈은 공익법인 등에 전달해야 해"라고 말하는 셈이다. 금전은 현금과 예금을 포함한 현금성 자산을 일컫는다. 해당 규정은 공익신탁이 사업 집행보다는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물도록 유도하는 장치로 지적받는다.

세제 상 혜택을 떠나 공익신탁법 자체도 넘어야 할 허들이 많다. 공익신탁법 11조(신탁재산의 운용)는 자금운용을 너무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공익신탁법 제11조 2항은 '수탁자는 금전이 아닌 신탁재산을 신탁행위 외의 방법으로 취득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기부할 때부터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받을 게 아니라면 기부 받은 금전으로 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금전으로 받은 돈은 반드시 국공채를 매입하거나 은행  등에 예치하는 등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공익신탁 선택할 이유 제시해야

물론 정부도 공익신탁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했다. 운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시제도를 도입했다. 법 제정 이후 관리ㆍ감독을 맡게 된 법무부는 '공익신탁 공시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법무부의 인가를 받은 공익신탁들은 ▲인가서 ▲사업계획서 ▲사업보고서 ▲공익사업 세부내역서 ▲손익계산서 ▲재무상태표 등을 작성하고 공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기부를 하는 본인이 직접 수탁자가 돼 공익재산을 운용할 수도 있다. ▲미성년자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및 파산선고를 받은 자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3년이 지나지 않은 자 등만 아니면 된다. 사회적기업은 물론이고 일반 영리회사 심지어는 개인도 수탁자가 될 수 있다. 공익신탁 활성화를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공익신탁 말고도 다른 대안이 많다는게 문제다. 공익활동을 담아낼 그릇은 민법상 비영리법인과 '공익법인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공익법인,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 따른 비영리민간단체 그리고 '협동조합기본법'의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등으로 다양하다. 단순히 기부금을 모집해 전달할 목적이라면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의 '모집자'도 떠올려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공익신탁이 법 제정 당시 내세웠던 ▲쉬운 기부 ▲투명한 운영 ▲내 맘대로 사용이 정말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되물어 봐야 한다.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미국 주식도 거래하는 요즘, 기부할 만한 곳을 찾아 자금을 이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동영상을 시청하며 동시에 후원금을 쏘는 시대다.

공익신탁이 더 투명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른 단체들이 듣기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리는 대목이다. 공익신탁이 법무부에 사업 실적과 신탁 재산 운용 내역을 보고하는 것 만큼 다른 비영리단체들도 정부나 지자체나 정기적으로 운영 상황을 보고 한다. 오히려 공익신탁보다 더 많은 곳에 보고의무를 지닌 비영리단체들도 있다. 공익신탁이 법무부 한 곳에 사업 실적과 신탁 재산 운용 내역을 공시할 때, 지정기부금 단체들 중 일부는 국세청에 기부금 모금 및 사용실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물론 주무관청(중앙부처나 시도지사)에도 사업 활동을 보고해야 한다.

'내 맘대로 사용'도 마찬가지. 공익신탁이 아니어도 만들기 쉬운 조직들은 다양하다. 비영리법인인 사회적협동조합은 공익신탁처럼 인가제를 채택하고 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정한 요건을 갖춘다면 신청 후 60일 안에 설립이 가능하다. 심지어 '비영리민간단체 지원법'에 따른 비영리민간단체와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의 모집자는 주무관청이나 시도지사에게 등록만 하면 된다.

후원금을 모집하고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해주는 것 역시 법이 정한 요건만 갖추면 된다. ①회원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사용하고 사업의 직접 수혜자가 불특정 다수(사회적협동조합은 조금 다름)이며 ②잔여재산을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유사한 목적을 가진 다른 비영리법인에 귀속하고 ③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되어 있고, 홈페이지를 통해 연간 기부금 모금액 및 활용실적을 공개하며 ④해당 비영리법인의 명의 또는 그 대표자의 명의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에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⑤지정 취소를 받은 날 또는 지정기간 종료일부터 3년이 경과하는 등의 요건을 갖춘 비영리법인이라면 국세청장으로부터 공익단체(구.지정기부금단체) 지정추천을 받아 기획재정부 장관의 지정을 받을 수 있다.

1년 하고도 한달 뒤면 공익신탁법 또한 제정 10년 차를 맞는다. 법 제정 당시 제도적으로 잘 활용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공익에 기여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다시금 들여다 볼 때가 됐다. 여러 대안들과 비교했을 때 공익신탁만의 강점이 무엇인지, 시민들이 공익신탁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공익신탁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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