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성·과학·박사’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는 4명의 칼럼니스트가 뭉쳤다. 미국에서 미생물학자로 일하는 문성실 박사, 영국에서 식물분자생물학자로 일하는 안희경 박사, 호주에서 물리학자로 일하는 김세정 박사,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오스트리아의 분자유전학자로 일하는 이지현 박사 등이다. 한국에서 학위를 받고 더 큰 꿈을 좇아 한국을 떠났던 이들. 2019년 9월부터, 3년 동안 본지에서 ‘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 이야기(이하 과여글)’라는 제목을 걸고 격주로 기고했다. 

과여글은 지난 8월을 기점으로 시즌 1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다양한 주제를 담은 74개 칼럼으로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과학자, 여성,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들은 학계 종사자, 워킹맘, 대학원생 등 다양한 범주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지난 9월 6일, 온라인으로 4명의 박사를 만나 시즌 1을 마무리한 소감을 공유했다.

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 이야기를 연재했던 박사들과 지난 6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맨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성실 박사, 이지현 박사, 김세정 박사, 안희경 박사.
과학하는 여자들의 글로벌 이야기를 연재했던 박사들과 지난 6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맨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성실 박사, 이지현 박사, 김세정 박사, 안희경 박사.

다양성·과학계·환경·커리어 등 다양한 주제 다뤄

그간 이들은 연구환경·학계, 성평등·다양성, 과학자 커리어, 환경보호 등을 주제로 하는 칼럼을 작성했다. 3년 동안 작성해온 글 중 각자 가장 기억에 남는 기고는 무엇일까.

이지현 박사는 ‘미디어 키친’에 관해 썼던 기고를 꼽았다. 고급 레스토랑 주방에 요리 준비와 설거지를 담당하는 인력이 따로 있듯, 해외 유수의 연구소에는 시약 준비와 실험 도구 세척 및 멸균을 담당하는 인력이 따로 있다. 이 일을 하는 공간을 '미디어 키친(media kitchen)' 이라 통칭한다. 국내 연구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개념이다.

이 박사는 지난 6월 이 글을 썼다. 그는 5월까지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에서 터를 잡았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미디어 키친에 대한 국내외 조사를 많이 했다”며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현재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 적용해보고자 노력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세정 박사는 한국의 대학 서열화에 대해 썼던 글을 회상했다. 김 박사는 2020년부터 멜버른 대학교에 조교수로 임용돼 근무 중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대학들이 서열 경쟁을 하는데도, QS 세계 대학 랭킹(QS World University Rankings)으로 봤을 때 한국은 50위 안에 2개(서울대·카이스트)뿐인데, 호주는 5개가 있다”며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 전 세계 인재를 끌어들인다는 점이 큰 이유로 작용한다. 외국인이 와도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거다. 아직은 어려운 문제지만, 우리나라도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성실 박사는 과학계에서 다양성을 키우기 위해 하는 노력을 담은 글을 꼽았다. 연구자들이 소수인종 교수·학생 유치와 다양성에 대한 문헌을 출판하고, 워크숍을 개최하고, 다양성 위원회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언급한 글이다. 중요한 건 이들 대부분이 비백인, 비남성이라는 사실이다. 포용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주류보다는 비주류다. 문 박사는 “이러한 노력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글을 썼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는 안희경 박사는 커리어-육아 병행을 다룬 글을 떠올렸다. 그는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일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이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논문이 아닌 텍스트로 발휘한 선한 영향력

그동안 표출됐던 74건의 칼럼 중, 평균 조회수의 4배 이상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기고가 있다. 바로 '박사후연구원'이라는 커리어에 관한 글이다. 학계에서 쉽게 '포닥(Postdoctoral Researcher)'이라 부르는 이 신분은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 또는 부설 연구소, 각종 연구기관(연구원) 등에 소속된 계약직 연구자를 뜻한다. 주로 이공계에서 통용되는 신분이다. 김세정 박사는 해당 기고를 통해 포닥 생활을 왜 선택하는지, 얼마나 오래 하는지, 실적은 얼마나 채워야 하는지 등을 다뤘다. 학위의 마지막 단계인 박사를 졸업하면 취업의 형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학생들의 고민이 담긴 관심으로 보인다.  

우수한 해외 과학 인력이 필요하지만 난항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글도 시선을 끌었다. 이지현 박사는 본인이 근무했던 오스트리아 연구소의 예를 포함해,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나라에서 연구 기관들이 뛰어난 국외 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소개했다. 이후 과기부는 국내 연구기관의 해외 우수 연구자 유치 및 협력을 지원하는 '국제연구인력교류사업'을 '해외 우수과학자 유치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해외 연구인력의 정주환경 여건 개선 등 유인을 강화하는 적극적인 시행계획을 내놨다.

문성실, 안희경 박사는 3년 동안 기고를 넘어 책을 발행하며 사회에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해 단행본 ‘사이언스 고즈 온’을 출간한 문 박사는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여성, 엄마,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이야기를 담았다. 코로나19로 세계인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바이러스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의적절한 책 출간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2022 APCTP 올해의 과학도서 상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안 박사가 내놓은 '식물이라는 우주'는 552쪽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가 주로 연구하는 '애기장대'를 중심으로, 식물의 생로병사를 담았다. 3월 초판 1쇄 발행 후 한 달 만에 2쇄를 찍었다. 안 박사는 최근 결혼과 출산이 여성의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에 대해 쓴 외서 '아이는 얼마나 중요한가'의 번역을 맡기도 했다.

박사들은 공통적으로, 과학자라고 해서 꼭 전공 지식 연구로만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과학과 대중 사이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물고, '과학자=연구실에 틀어박힌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타파하고, 학계 시스템을 바꾸는 역할은 연구자가 주체로 나서서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들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점점 더 나아지는 환경 되길 바라…우리 글이 ‘철 지난 글’ 됐으면”

연재 건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글은 단연 연구환경과 학계에 메시지를 던지는 내용이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은 열정페이와 무급노동이 만연한 환경이다. 육아를 하는 여성일 경우 상황은 더 가혹하다. 박사들은 다양한 사례로 이러한 현실을 기록했다. 우리보다는 조금 더 ‘워라밸’이 보장되는 미국·유럽권의 문화를 소개하면서 말이다.

총 74건의 기고글을 주제별로 나눠 원형 차트를 만들었다.
총 74건의 기고글을 주제별로 나눠 원형 차트를 만들었다.

유학에 관심있는 학생, 육아를 하며 과학인의 길을 걸을 엄마, 열정페이에 지치고 상처받은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 등 다양한 범주의 독자가 과여글을 찾고 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반응도 나온다. 문 박사는 “임신한 과학자가 계속 일할 수 있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배려한답시고 일에서 배제해버리면 오히려 커리어에 단절이 생기는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여러 교수님들로부터 ‘기고를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앞으로도 과여글은 다양한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안 박사는 "하나하나 읽어보면 과학하는 사람들만의 서사가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박사는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며 파급력을 자랑하는 칼럼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썼던 글이 누군가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과정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과학계,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전했다. 이 박사는 “우리가 칼럼을 통해 제기한 문제가 모두 해결돼서, 언젠가는 '철 지난 글' 취급을 받았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저희가 쓴 게 ‘정답’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독자들이 괜찮은 ‘레퍼런스’ 정도로 여기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살고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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