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몸이 아픈 엄마와 함께 상처를 안고 산골 오지로 이사 온 소년 작가 정여민 군은 고구마와 고사리, 꾸지뽕 열매를 나눠주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너무 뜨거워서 다른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너무 차가워서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도 않는 온도를 ‘따뜻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 나누는 인사에 바로 이 ‘따뜻함’이 깃들기 바라며, 마을 터 곳곳에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정다운 삶의 씨앗을 뿌리고, 나눔과 수확의 기쁨을 거두는 강원도마을공동체 3곳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텃밭으로부터 움트는 마을의 변화는 어떤 꽃을 피우고 있을까요?

■ 춘천 뉴시티코아루아파트

함께하는 우리 아파트, '행복나눔 텃밭'

뉴시티코아루아파트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뉴시티코아루아파트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춘천 외곽에 위치한 뉴시티코아루아파트는 2013년 입주 초기, 463세대 1,500여 명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며 으레 입주 초기 아파트들이 겪는 혼란과 갈등 속에서 이웃 간 서먹한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은퇴 후 조용한 삶을 찾아 이주한 어르신이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입주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지만 주변엔 마땅히 갈 곳도 없었죠.

층간 소음, 주차 문제 등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줄이고 아파트 단지 안에서 주민들이 즐거이 누릴 수 있는 활동이 필요했습니다. 쓰레기만 쌓이던 아파트 옆 노는 골칫덩이 땅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 토지 소유주가 시행사인 덕에 그 이듬해인 2014년부터 13㎡(4평) 씩 구획을 나눠 37개 텃밭을 만들고 분양을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 120여 세대가 텃밭 분양에 참여하면서 경쟁률은 3:1에 달했습니다. 주민들의 높은 참여율과 호응으로 매해 텃밭의 규모를 늘려 현재는 127개 텃밭이 아파트 주변으로 3000㎡(약 1000평)에 이릅니다.

사실 농사에 익숙지 않은 터라 텃밭 분양을 시작하고 두 해쯤은 주민들 대부분이 어떻게 텃밭을 가꿔야 할지 조금 어리둥절했습니다. 언제 무엇을 심어야 할지, 물은 어떻게 주어야 할지 막막할 때, 텃밭을 중심으로 한 관계 맺기는 오히려 물꼬를 트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농사에 대한 조언을 나눠주었고, 어린 자녀와 함께 텃밭을 찾는 가족들이 늘어났습니다. 아파트 경로당에 텃밭 한 칸을 나누었더니, 어르신들의 소일거리도 생기고 부식거리도 늘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씨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서먹했던 이웃 간에 정다운 인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뉴시티코아루아파트 가든파티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뉴시티코아루아파트 가든파티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2019년 강원도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는 텃밭을 분양받은 텃밭 농부뿐 아니라 아파트 전체로 공동체 의식이 꽃 피기 시작했습니다. 텃밭에 팻말을 꽂고 주변으로 꽃들도 쫑쫑 심어두어 오가는 눈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텃밭 행사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고 푸릇푸릇한 쌈 채소를 거둬 마련한 삼겹살 가든 파티에는 주민 400여 명이 참여하며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조금씩 싹 틔우던 공동체 의식은 지원 사업과 함께 더 풍성해졌습니다.

이제 텃밭이 없는 뉴시티코아루아파트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텃밭은 주민들에게 큰 자랑이자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질 땐 해소할 길 없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민들은 텃밭을 가꾸며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도 함께 키웠습니다. 텃밭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인원들이 공동체 생활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높고, 또 긍정적인 분위기를 견인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은 텃밭에서 시작된 변화가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에 대한 자긍심을 모아 아파트 공동체에 활기와 웃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뉴시티코아루아파트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뉴시티코아루아파트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미니 인터뷰]우리 마을을 자랑합니다.

"텃밭이 불러온 모두의 즐거움" - 조영욱 춘천 뉴시티코아루아파트 관리소장

Q. 텃밭이 불러온 아파트 공동체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아파트는 이웃사촌보다는 이웃 웬수가 될 여지가 높은 주거 환경이에요. 때문에 주민 간 갈등이나 불화가 잦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아파트는 다른 곳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조용해요. 갈등이나 불화가 현저히 낮은 데에는 텃밭이 큰 몫을 하고 있고요.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들과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춘천에는 100여 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지만 공동텃밭을 가꾸는 곳은 이곳밖에 없어요.
 
Q. 텃밭을 운영하면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주민들이 텃밭에 가지는 애착이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매일매일 덩달아 즐거워요. 다른 사람이 가꾼 텃밭이 보이잖아요. 잘 가꾼 텃밭을 보면서 더 잘 가꾸고픈 의욕을 보이시기도 하고, 조금씩 유쾌한 경쟁들도 벌어져요. 특히, 어르신들이 텃밭에 애착을 많이 가지시는데 거동도 어려웠던 고령의 어르신이 텃밭을 신나게 가꾸시면서 건강이 나아진 모습을 봤을 때가 내심 놀랐던 일이 기억나네요.
 
Q. 마을텃밭을 준비하는 공동체에게 조언한다면?
무조건 가까워야 해요. 타지역에서도 아파트 텃밭을 시도하는 곳이 간혹 있는데, 조금이라도 거리가 있으면 금방 시들해지더라고요. 출근길에 들여다볼 수 있고, 퇴근길에 고추, 상추 한 줌씩 들고 집에 갈 수 있는 정도의 접근성이 중요해요. 그다음에는 행사를 열어서 텃밭을 매개로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으로 관계를 맺으면 정말 좋아요. 봄에 공동으로 모종을 구매해 함께 심는 날을 가지거나 텃밭에 수확물을 거둬서 경로당에 드릴 김장김치를 만든다거나 가든 파티를 열어도 좋아요. 만족도도 높고, 다들 즐거워하세요.

■ 홍청 진2리 경로당

경로당 텃밭에서 꽃 피는 나눔

진2리 경로당 감자캐기 체험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진2리 경로당 감자캐기 체험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홍천읍 진리는 조선시대 홍천 고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나루터가 있던 자리라 과거부터 나루(津)로 불리다가 한자 뜻을 그대로 가져와 진리가 되었습니다. 마을의 오래된 역사와 함께 세월을 머금은 진2리 어르신들은 경로당을 사랑방으로 오순도순 모여 다복한 정을 나눕니다. 사람이 모이면 먹을거리가 빠질 수 없죠. 다만 늘 빠듯한 것이 경로당 예산이다 보니 마음처럼 풍족하게 나누기란 쉽지 않습니다. 본래 진리는 단순한 법, 어르신들의 혜안은 간단합니다. “부족하면 우리 손으로 직접 농사지으면 되지!”

2018년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마을 곳곳에 놀고 있는 땅 몇 곳을 무상으로 임대 받아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찬거리로 쓰인다 해도 선뜻 땅을 내주기란 어렵지 않겠나 싶어도 군 제대 후 청년 회장부터 새마을지도자, 이장까지 내리 마을 일에 솔선수범한 노인회장의 부탁으로 500평 규모의 텃밭이 마련됐습니다.

텃밭이 경로당 바로 곁에만 있진 않아서 아침이면 노인회장의 봉고차로 이동하면서 농작물들을 가꿉니다. 상추나 아욱, 감자, 고구마, 파, 고추, 콩, 옥수수, 들깨, 참깨 등 부식거리를 종류별로 심고, 김장할 무, 배추도 넉넉하게 심습니다. 모두 다 같이 땀 흘려 수확한 작물은 각자 집으로 가져가려고 욕심내는 일 없이 경로당 찬거리로만 사용하지만 몇 가지 예외의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나눔입니다.

진2리 경로당 만두빚기 및 후원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진2리 경로당 만두빚기 및 후원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어르신들은 감자 수확 시기가 되면 밭 한 칸을 비워두고 작물을 수확합니다. 마을 안에 있는 강룡사유치원 아이들의 감자 수확 체험을 위해 남겨둔 자리입니다. 올해로 3회 차를 맞는 감자 수확 체험은 아이들을 위해 어르신들이 유치원에 직접 제안한 프로그램입니다.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흙을 파내며 감자가 나올 때마다 까르르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게 그렇게 배꼽 잡게 우습다며 어르신들도 까르르까르르 웃습니다.

넉넉하게 심은 무, 배추로 담근 김치는 겨우내 소일거리로 만두를 빚어 판매하는데, 판매 수익금은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됩니다. 어르신들은 홍천군에서 연말에 200만 원씩 성금이나 물품을 턱턱 내놓을 수 있는 경로당은 진2리 밖에 없다며 자부심도 내보이죠.

마을 경로당 찬거리를 위한 텃밭은 이제 세대 간 소통과 웃음을 부르고,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며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진2리 경로당 어르신들의 식탁이 풍족하길 바라며 마련한 텃밭은 공동체가 함께 땀 흘리며 수확을 거두는 터이자, 먹지 않아도 배부른 넉넉한 나눔터가 되었습니다.

진2리 경로당 점심나눔 / 제공=강원도마을
진2리 경로당 점심나눔 / 제공=강원도마을

미니 인터뷰_우리 마을을 자랑합니다.

"거리두기 끝, 같이 밥 잡숩시다!" - 임근상 진2리경로당 회장

Q. 텃밭농사가 힘드실 텐데, 갈등이 생기진 않나요?
나이들이 있다 보니 안 힘들다 할 순 없지만 또 우리 경로당 자랑인 게 서로 서로 배려를 참 많이 해서 미움 없이 즐겁게 하고 있어요. 공동체를 하면 으레 싸움이 나기 마련인데, 우리 경로당은 싸움이란 게 없어요. 나이가 적고 많고 따지지 않고 서로 의지하면서 경로당 위주로 공동체가 돼서 서로 돕고 살자고 하죠.

Q. 코로나19, 어떻게 보냈나요?
경로당이 문을 닫아서 같이 식사를 하진 못했지만, 지인들과 텃밭농사는 계속 지어서 옥수수며 감자며 혼자 사는 어르신들 댁에 집집마다 가져다드렸어요. 올해 5월부터 다시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는데, 같이 밥 잡숩시다!하고 신나게들 연락 돌리면서 식탁에 다시 둘러앉을 수 있게 됐어요.
 
Q.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올해는 무, 배추 넉넉히 심어서 작년에 못했던 만두 빚기 꼭 하자고 약속했어요. 직접 농사짓고, 만두 빚어 어려운 사람 도울 수 있다는 게 우리한테 큰 보람이거든요. 노인네들이 맨 도움만 받는데, 우리도 베풀 수 있으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올해 그거 하나는 꼭 할 거예요.

■ 원주 문막동구밭

텃밭으로 나누고, 텃밭으로 흥겨운 '우리'

누구나 마음의 고향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터입니다. 힘들면 의지하거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 장소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고 자란 곳이 아니어도, 지금 살고 있지 않아도 내 마음에 위안을 준다면 바로 그곳이 내 터가 됩니다.

문막동구밭 공동체는 문막읍 대둔리를 마음의 고향으로 깃발 꽂아두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장애인들과 나누고자 봉사동아리로 시작했는데, 대뜸 대둔리에 3000㎡(1000평) 정도 토지를 매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마을에서 농사만 짓기보다는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지고 싶어졌습니다. 2021년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에 신청하고, 열심히 교육도 받아서 공동체에 대한 이해도 높였습니다. 이제 순탄하게 무엇이든 잘 이뤄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에게 문막동구밭은 낯선 이방인이었습니다. 감자 수확을 한 달 앞두고, 푸짐하게 음식을 해 무작정 마을 경로당으로 향했습니다. 마을 어르신 20~30여 명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한 달 뒤 감자 수확에 맞춰 준비한 팜파티에도 어르신들을 초대했습니다. 농사도 지어본 적 없는 맹탕들이 어려운 사람들 돕겠다고 농사짓겠다 하고, 봄에는 감자, 가을에는 무, 배추 수확했다고 장애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같이 밥 먹고 쿵짝쿵짝 공연까지 벌이니 오랜만에 마을에 사람도 드나들고 요상하게 활기를 띕니다.

문막동구밭 배추 300포기 후원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문막동구밭 배추 300포기 후원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진심이 통했을까요? 뭐 하는 놈들인가 하던 마을 주민들의 의심의 눈빛에 다정함이 스미기 시작했습니다. 타지인과 마을 주민들로 이뤄진 공동체 구성원들은 텃밭을 매개로 자연스러운 교류와 왕래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타지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는 만큼을 마을 어르신들이 메워주고, 낯선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 준 어르신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가운데 뿌려둔 씨앗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땀 흘려 거둔 농작물은 원주시 사회복지협의회와 홀몸어르신에게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는 원주 나누리, 사단법인 빛과꿈터 일과사랑 등 여러 기관에 기부됐습니다.

마음을 나누는 옹골찬 1년을 보내고 다시 감자 수확을 맞아 올해의 팜파티 문을 활짝 연 문막동구밭, 서먹한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이웃이 되었습니다. 유쾌한 마을잔치에는 장애인도 타지인도 주민도 없이 그저 ‘우리’가 되어 쿵짝쿵짝 흥겨울 따름입니다.

문막동구밭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문막동구밭 텃밭 / 제공=강원도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미니 인터뷰_우리 마을을 자랑합니다.

"텃밭으로 다정한 이웃이 생겼어요" - 이영미 원주 문막동구밭 회장

Q. 마을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소통과 화합’이었어요. 농사야 어떻게든 지을 수 있지만 마을에 살지 않으면서 마을 주민들과 정다운 교류를 나눈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각오하고 낯가림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더 빠르게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진심을 알아주신 걸까? 싶더라고요. 주말이면 먼저 나와서 기다려 주시고, 눈 한번 맞추기도 어려웠던 게 언제인가 싶게 이제 물 한 잔쯤은 맘 편히 얻어 마실 수 있는 이웃이 되었어요.

Q. 향후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팜파티에서 농작물을 판매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많이 들어요. 여력이 되면 판매도 해볼까 싶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농사만 짓지 말고 마을 어르신들하고 마을 밖으로 견학이나 체험을 나가보려고도 해요. 감자, 무, 배추 말고 특용작물을 발굴해서 마을의 전체적인 농가 수입을 늘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제 막 시작했잖아요. 여러 가지 꿈을 꿔보려고 해요.

저작권자 © 이로운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