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復棋)’란 한판의 바둑이 끝난 뒤 처음부터 지나간 수순들을 되짚어 잘못된 부분이나 실수를 분석하고 연구, 검토한다는 뜻을 가진 바둑용어인데 요즘에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쉽게 입에 올릴 만큼 우리 일상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어느 정도일까. ‘복기’에 관련된 최근 신문기사 제목을 검색해봤다. ‘[2018 삼성월드바둑마스터] 복기 선생님이 된 AI', '이재성의 냉정한 복기, 골 말고는 한 게 없던 경기’, ‘악바리 손아섭, 매일 타격영상 복기’, ‘김동연, 경제 정책 효과 복기’, ‘김지운 감독, 한동안 <인랑>에 대해 생각하고 복기’ 등 끝이 없다.

모두 바둑의 복기를 일상에서 활용한 예인데 사실, 바둑의 복기는 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다. 바둑 이외의,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나 스포츠도 복기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복기와 유사한 과정을 갖는다. 패인을 분석하고 연구와 검토를 거쳐 다음 승부에 대비하는 행위는 바둑의 복기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바둑의 복기는 ‘조금 더 특별하다’는 것일까. 그것은 한판의 바둑이 끝난 뒤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맞대면서 시작되는 <소통과 공감의 특이성> 때문이다. 이 세상 어떤 승부에서 패자와 승자가 머리를 맞대고 승인과 패인을 분석하고 연구, 검토하면서 함께 최선의 길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없다. 오직 바둑뿐이다. 그래서 바둑의 복기가 보여주는 소통과 공감의 의미가 큰 것이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최선의 길을 찾아내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정신>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받아들여야 할(이미 그런 예가 많다) 바둑만의 복기의 가치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둑에, 특히 그 승부와 수법에 깊이 몰입한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복기를 거듭하면서도 그 화합의 정신에 닿지 못하고 승부에 매몰돼 바둑의 좋은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 (청정지역으로만 알았던 바둑계에 들이닥친)#미투에 대한 한국기원의 어설픈 대처와 프로바둑 후원의 바닥 모를 침체도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래 전 경기도 S교도소에 바둑인문학 특강을 나간 적이 있었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질문을 받았는데 맨 앞줄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듣고 있던 한 중년남자가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 바둑의 좋은 점을 말씀해주셨는데 맞다. 인정한다. 나는 바둑유단자다. 집중력 향상에 좋고 뇌를 자극해 수리력, 추리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싶었는데 망설이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바둑 때문에 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둑에 너무 깊이 빠져 일을 소홀히 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좋은 기회 다 놓치고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쳐도 되겠나?”

곤혹스러운 질문이었다. 바둑에는 분명, 알면 알수록 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깊이 빨려드는 중독의 힘이 존재한다.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그 승부의 재미는 지나치면 생업을 위협할 수도 있는 독이다.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바둑을 꽤 오랜 시간 즐기신 것 같은데 그 중에서 복기를 한 바둑이 얼마나 됩니까?”

다행히(?) 그는 거의 없다고 대답했고 뒤 이은 나의 처방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안겨줄 수 있었다.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치셔도 좋겠습니다. 한판의 바둑이 끝나면 반드시 복기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고 왜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맞대고 복기를 하는지 꼭 알려주세요.”

바둑의 복기는 그저 지나간 수순의 오류를 분석하고 연구,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출발의 정신이 훨씬 중요하고 패자와 승자가 모든 과정을 함께 하며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결과의 공유도 꼭 그만큼 중요하다.

무슨 말이냐? 바둑의, 복기의 가치와 미덕은 승부에서 화합으로 진행되는 소통과 공감에 있다는 얘기다. 바둑을 바둑이 아닌 것으로 말할 수 있을 때 바둑의 외연이 넓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 바둑의 복기는 이미 오래 전 승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일상의 언어가 되고 있는데 정작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만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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