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극 해빗 리허설 장면. 발달장애인 단원들은 지난해 11월부터 극을 위한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현대무용극 해빗 리허설 장면. 발달장애인 단원들은 지난해 11월부터 극을 위한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안녕하세요~ 레크리에이션 오피스 ‘레크로피스’의 민정기입니다. 제가 몇 가지 놀이를 준비해왔는데요. 저는 관객 여러분께 넌센스 퀴즈를, 관객 여러분은 저에게 19단 문제를 내주시면 됩니다. 퀴즈를 맞히는 분들께는 선물을 드립니다~”

“러시아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힌트, 힌트 좀 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정범진입니다. 저는 극단 라하프가 어떤 곳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라하프는 공연활동이나 수업 등의 영상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어요. 구독과 좋아요 많이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랩이랑 뮤지컬 하셨다고 했는데 노래랑 랩도 해주요~ 궁금해요~!”

‘어머, 궁금하다 나도 가봐야겠어’, ‘저기는 뭐하는 거지?’, ‘으하하~ 너무 재밌다’, ‘저한테만 어려운 퀴즈를 내주시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하면 안되나요?’. 극단 라하프가 선보인 현대무용극 '해빗(Habit): 다름, 닮음' 공연 현장에서 발달장애인 단원들과 관객들의 양방향 소통이 이어졌다. 이날 공연은 혜화에 위치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센터 이음홀에서 4월 22일 진행됐다.

공연 전, 리허설 현장에서도 발달장애인 단원들과 관계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지가 보였다. 세심한 점검이 이어졌다. “자자~ 자기 코너 소개 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속으로 다 같이 천천히 ‘하나, 둘’ 세고 다시 고개를 들어볼까요.”(인사 속도 맞추기), “그 위치에 서 있으면 이따 움직이면서 칠판을 가릴 텐데, 왼쪽에 서볼까요?”, “연기하면서 옷걸이가 흔들리지 않게 제자리에 놓아볼까요?”, “단원들이 너무 지치지 않게 이 정도로 점검하면 될 것 같네요!” 등등. 어찌보면 당연한 것을 공연 관계자들은 단원들의 시각에서 풀어서 설명하고 단원들과 다시 한 번 합을 맞춘다.  

해빗은 발달장애인 단원들이 주인공이다. 각 단원들의 기상부터 출근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대를 꾸몄다. 씻고, 매무새를 다듬고 대중교통 이용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은 비장애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발달장애인이 일상에서 어려움을 느낄 만한 부분들이 보인다. 

극 내 마련된 소통형 프로그램은 관객들이 발달장애인들의 행동을 이상하거나 특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고민하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현대무용극 해빗은 관객들에게 ‘우리 사회는 발달장애인과 소통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을까?’, ‘우리는 우연히 일상에서 발달장애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진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한길 단원, 한소라 단원, 민정기 단원, 정범진 단원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한길 단원, 한소라 단원, 민정기 단원, 정범진 단원이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현대무용극에서 발달장애인과 소통해보세요 

해빗은 발달장애가 있는 이한길·민정기·정범진·한소라 단원이 눈을 뜨고 일터로 나서는 일상을 연기와 안무로 보여준다. 한길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정기는 면도와 헤어 스타일까지 꼼꼼하게 신경쓴다. 범진은 시계와 옷 등에 관심을 갖고, 소라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챙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재은 단장은 “단원들의 일상 하나하나가 창작이 되고 작품이 됐다”며 “어떻게 표현할 건지, 안무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원들과 소통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단원들이 존중받는다는 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통해 단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창작 활동에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대 세트도 단원들이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반영했다. 공연의 묘미는 관객과 발달장애인 단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체험형 퍼포먼스다. 이한길 단원은 쉽게 설명하는 역사, 민정기 단원은 넌센스x19단 퀴즈, 정범진 단원은 극단 라하프의 소개, 한소라 단원은 커피와 차를 내리는 코너를 준비했다. 이를 통해 발달장애를 가진 단원들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 단장은 “발달장애인들은 성향이 개별적이고 다양한데 비해 발달장애인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적다”며 “발달장애인의 연극이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양방향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해빗은 2021년 11월부터 라하프를 비롯해 안무, 무대, 연출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하며 준비하고 있다.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로 국제적 무대에서도 선보일 수 있어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바가 크다. 본공연은 여러 단계의 보완과 수정을 거쳐 2023년 경 선보일 예정이다. 정소연 연출/안무가는 “작업의 완성이 아닌 초기 작업 상태에서 관객분들을 만나게 됐지만 발달장애인 예술가가 함께 만드는 작품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넌버벌 퍼포먼스 : 대사가 아닌 몸짓과 소리, 리듬과 비트만으로 구성된 공연.

해빗을 준비하며 단원들과 소통한 과정들. 원하는 공간을 직접 만들고, 헤어 스타일링, 코너명, 관객과 나눌 대사 등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해빗을 준비하며 단원들과 소통한 과정들. 원하는 공간을 직접 만들고, 헤어 스타일링, 코너명, 관객과 나눌 대사 등을 꼼꼼하게 준비했다.

발달장애인의 사회활동은 불가능한가요?

“한길 엄마, 이 세상에 그런 건(발달장애인 강사, 발달장애인 배우) 없어. 생각해 봐 발달장애인들이 가르친다고 하면 거기에 보내겠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김재은 단장은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발달장애 당사자 역시 ‘발달장애인은 선생님이나 배우가 될 수 없다는데 왜 될 수 있다고 하는거예요?’ 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라하프는 ‘그런 일을’ 해냈다. 현재 라하프의 단원들은 공연을 하고 예술교육 보조강사 활동을 한다. 특수반 학생들에게 뮤지컬이나 탭댄스, 랩 원데이 클래스부터 주차별 뮤지컬 강의 등을 진행 중이다. 

라하프는 대학에 진학한 발달장애인 대학생들의 부모님이 모인 자조모임이 그 시작이다. 비장애인 청소년들과 학교를 다닐 때 달라서 잘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들이 대학에서 친구가 돼 어울리고 놀러다니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들이 많이 놀라기도 하고 기뻐했다. 이후 아이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을 모았고, 2016년 라하프를 만들었다.

2017년 창작뮤지컬 'This is our story'로 대중문화 및 미디어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동을 한 인물과 작품에 수여하는 대한민국 국회대상 뮤지컬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 2018년 평창 패럴림픽 공연, 한일 국제교류 공연 등을 진행하는 등 발달장애 인식개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년에는 정기공연으로 창작뮤지컬 ‘The Voice’를 진행했다.  

단원들과 부모님들은 더 많은 활동을 위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김 단장을 비롯해 부모님들은 사회복지와 장애학, 문화예술경영 등을 공부하고 있다. 김 단장은 “라하프로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매일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내가 아는게 없네’를 외치게 된다”며 “다양한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라하프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체 공연은 내년에 정식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Habit 정식공연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려요.”-김재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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