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코이카(KOICA) 설립 이후 여성으로는 최초로 백숙희 이사가 취임했다.

‘넌 아직 젊잖아!’ 남성이 다수인 조직에서 승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했다. 경력으로 치면 순서가 분명했지만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해외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승진은 늦어지고 미뤄졌다. 그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여성 동료들과 함께 얼굴을 구긴 채 입에 고인 씁쓸함을 삼키는 것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조직이었던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에서 1991년 설립 이후 27년 만인 지난달 9일 첫 여성 이사가 취임했다. 코이카는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진행하는 외교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여성이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어려운 대표적인 조직으로 꼽혀왔다.

백숙희 신임 이사(54)는 “조직의 역사를 생각하면 첫 여성 이사가 너무 늦게 나오기는 했다”면서 “지난해 이미경 이사장도 여성으로서는 처음 수장 자리에 오른 만큼, 앞으로 조직 내에 여성 리더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중간 관리자들을 육성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코이카 창립 멤버로 입사해 30년 가까이 재직해온 백 이사는 내부에서 ‘역사의 산증인’이라 불린다. 그동안 개발기획제도팀장, 행정제도팀장, 보건의료팀장, 민관협력실장, 경영관리부장, 캄보디아사무소장, 경제개발부장, 고객만족 CS센터장 등 다양한 보직을 거치며 업무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현장 전문가’이기도 하다.

백 이사는 앞으로 2년 임기 동안 “무엇보다 코이카를 소통이 잘 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다”며 “소통이 잘 돼야 협업이 가능해지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좋은 성과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백 이사는 국내 원조 업무를 수행하던 한국과학재단에서 1987년부터 일하다가 코이카 설립을 함께 이끌었다.

-여성 임직원이 늘어나면서 조직 내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부에서 ‘여성 쿼터제’를 도입하면서 성비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고 있잖아요. 코이카의 10대 혁신과제 중 ‘3년 내 여성 임원 및 보직자 비율을 40%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미경 이사장과 제가 취임하면서 임원 비율은 도달했고, 현재 여성 보직자의 비율은 35.6% 정도예요. 설립할 때인 1990년대 비교하면 여성 직원의 수가 크게 늘어났는데, 워낙 우수한 인재들이 많아서 앞으로는 여성의 비율이 역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성들의 강점은 책임감이 강하고 집중력이 높으면서 ‘멀티’가 가능하다는 건데, 코이카에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봐요. 최근 전략기획팀장, 경영혁신기획팀장, 혁신사업실장, 글로벌인재실장 등 핵심 부서의 장을 여성들이 맡게 됐어요. 이들이 나중에 조직의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키우는 역할을 임원들이 해야겠죠. 사실 남녀를 떠나서 각자가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똑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야 하잖아요. 이번 정부에서 특히 그런 점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니,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장 출신’ 이사에 대한 내부 조직원들의 기대도 클 것 같은데요?

▶이사라는 직책이 조직 전체를 아울러야 하는데, 아무래도 다양한 부서에서 쌓은 경험에서 도움을 받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이 있는데 다른 사업과 연결시키면 훨씬 시너지가 날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죠. 또 현장의 어려움을 잘 아니까 조언해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해외 사무소로 나갈 때 직원들이 겪는 육아의 어려움, 현지에서 사업 성공 여부에 대한 고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려고 해요. 저도 현장에 있을 때는 너무 힘든 적이 많았는데, 지나고 보니 다 도움이 되더라고요. 역시 경험이 제일 큰 자산이에요.(웃음)

지금은 아프리카?중동?중남미 본부를 맡아 해외 사무소 31곳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개도국 중 파트너 국가의 공무원, 인사 등을 초청해서 여러 가지 사업에 대한 좋은 점, 어려운 점에 대해 알려주는 연수사업을 총괄하죠. 각 국가의 환경, 문화, 사고방식이 워낙 다양한데다 거리가 멀어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연간 4900명 정도를 초청할 만큼 크고 중요한 사업입니다.

-이사로서 수행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실패 사례 공유 워크숍’을 여는 거예요. 사실 성과가 잘 나온 성공 사례들은 포털에 검색만 하면 바로 나오지만, 실패 사례는 공개하는 것 자체가 어렵거든요. 하지만 실패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점과 그것을 통해 발전 가능한 측면도 분명 있잖아요. 이번 정부에서도 ‘실패박람회’를 여는 것처럼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공적개발원조(ODA)에 관한 코이카 직원들의 경험을 한데 모아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려고 해요. 어디에서도 나올 수 없는 양질의 지식들이 많은데, 국가적으로도 소중한 정보잖아요. 이번에 ‘ODA연구정보센터’를 세워 관련 지식과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국민들께 공유하려고 해요. 이 정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이나 비즈니스가 개발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코이카는 지난 2015년부터 CTS 프로그램을 통해 3년간 총 33개 사업을 발굴했다. 한국 혁신가들에게는 창업과 취업의 기회를 주고, 개도국 주민들에게는 보다 나은 삶에 다가가는 기회를 준다.(사진=코이카 제공)

-코이카가 개도국을 돕는 방식은 어떻게 변화했나요?

▶모든 과정에는 일정한 순서와 단계가 필요하다고 봐요. 쓰레기매립장을 예로 들면 일단은 쓰레기를 모아 쌓아놓은 다음, 땅을 파서 묻고 침출수를 빼낸 뒤 소각로로 가서 태우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잖아요. 어느 한 나라의 사회적?경제적 발전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고, 건너뛸 수 없는 단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초창기에는 개도국에 건물을 지어주고 자동차를 주는 식의 원조부터 시작했죠. 이후 역량이 올라오면 의사나 교사 등 전문가를 보내 교육을 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시스템이나 제도를 구축할 수 있게끔 해요. 최근에는 코이카 단독이 아니라 여러 단체와 함께 펀딩 형식으로 참여하는데, 지원받는 국가의 정부도 포함시켜요. 처음에는 도너가 60%, 정부가 40%를 투자해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고, 도너의 비중을 점차 줄여서 자립하게끔 만드는 식이죠. 예전에는 무언가를 하나 만들어주고 끝냈다면, 이제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일에 주력해요.

-최근 ‘사회적가치’ 창출이 화두인데, 코이카는 어떻게 실현하고 있나요?

▶개도국을 지원하고 평화, 인권, 민주주의, 성평등 등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힘쓰는 코이카의 모든 활동이 사회적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국내 기업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ODA 분야에 적용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 기술 프로그램(CTS) 공모전’을 꼽을 수 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틀에 박힌 방법으로 개도국을 도왔다면, CTS는 그야말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죠.

국내 스타트업 ‘노을’이 개발한 ‘말라리아 진단 키트’ 사례가 있는데요. 1개당 비용이 1~2$으로 합리적이고, 감염 여부도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이에요. 캄보디아, 말라위 같은 개도국에서는 말라리아 발병률과 사망률이 높아 꼭 필요한데, 코이카의 CTS를 통해 노을과 연결하게 된 거죠. 한국 기업에는 기술과 사업성을 시험해보는 장을 마련해주고, 개도국에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윈윈 방식’입니다. 앞으로 코이카의 사업 수행 방식 전반을 혁신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백 이사는 "내가 뭔가를 발굴해 당장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보다는 내 다음 다음 사람이 성과를 내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코이카는 2016년 일부 사업이 국정농단 사태와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고, 이듬해 몇 간부의 성추행 문제가 연달아 불거지면서 국민적 신뢰를 잃기도 했다. 조직 전체의 혁신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 백 이사는 “이미경 이사장님과 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이야기한다”며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단단한 원칙을 세우고 지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백 이사가 임기 내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은 ‘소통’을 위한 실천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뗐다. 지난 5월부터 백 이사 주도로 직원들과 함께하는 독서토론 모임을 시작한 것인데, 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동안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구본준 기자의 ‘마음을 품은 집’ 등을 읽고, 각자의 일상이나 ODA 사업과 연관시킬 수 있는 점에 대해 토론했다.

“결국에는 리더가 바뀌어야 조직이 바뀔 수 있어요.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느냐에 따라 조직이 변화할 수 있는 거죠. 저는 무엇보다 직원들과 소통을 잘하는 리더가 되고 싶고, 그런 부분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글. 양승희 이로운넷 기자
사진. 이우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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