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홈페이지는 ‘근조’ 검은색이다. 많은 시민이 그의 영면을 기도하는 글을 남기도록
추모메시지란을 만들었다. 출처=정의당

 

 

 

 

'그를 보스로 둔 기자들을 부러워했던’이란 페이스북 짧은 단상에 지인이 물었다. “그가 언론인이었어?”

진보정치의 대가로 노회찬을 기억하는 다수 사람들은 그가 ‘매일노동뉴스’를 창간하고 초대 발행인이었다는,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럴 만도 하다. 매일노동뉴스처럼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매체가 대한민국에 여전히 존재하면서 창간 30년을 향해가고 있지만, ‘매일노동’이라는 그 희귀성 때문에 여전히 시민 다수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이름을 가깝게 알게 된 건 20대 초반이다. 휴학하고 1991년 가을부터 2년 정도 노동운동 단체에서 노동조합과 지역 활동가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가 인민노련 출신의 활동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992년 7월 18일이 첫 호 발행으로 기록돼있는 매일노동뉴스를 접하면서 그 존재는 비로소 커졌다. 매일노동뉴스는 한글 파일로 편집돼 PC통신으로 배달됐다. 그 소식지를 출력해 구성원들이 볼 수 있게 하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었던 적이 꽤 많았다.

매일노동뉴스는 제호에 충실했다. 매일,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소식을 깨알같이 담았다. 1994년 5월, 내가 첫 직장으로 노동자신문에 몸담은 후에도 매일노동뉴스는 내 취재 활동의 ‘원천 정보’ 중 하나였다. 이른바 진보 언론조차도 긍정이든 부정이든 ‘언론의 격식’을 따지며 미디어의 형식을 갖추고자 할 때, 매일노동뉴스는 철저하게 노동의 편이고자 했던 걸로 기억한다.

노회찬은 2000년 이후 의회정치의 길로 본격 나섰다. 그의 언론인적 기질과 감각은 정치판에서 십분 발휘됐고, 그의 말은 늘 어록으로 회자됐다.

재치와 유머 코드로 통하는 정치인 그가 만약 정치 대신 언론인의 길을 갔다면 어땠을까. 그를 베어버린 일등신문의 무딘 칼이 지금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두터운 방패가 됐을까. 자본 앞에 알아서 굴복하는 언론 현실에서, 아닌 척하면서 권력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언론 현실에서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분명한 건, 날카롭지만 심금을 울리는, 그가 보듬고자 했던 사람들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삶의 글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책임지고 했던 입법 활동이 그 증거다. 노동자와 시민 다수의 불편함을 풀어줄 여러 법안을 발의하고 제정까지 되도록 한 그의 노력을 돌이키면, 촌철살인으로 권력을 아프게 하고 감시하고, 시민들을 즐겁게 하는 ‘밥값 하는’ 기자 언론인 노회찬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대표적으로 발의, 제정된 법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복지법’ 개정이다. 장애인이 관광활동을 할 때 차별받지 않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은 노 의원 발의로 2007년 제정됐다.

“좌파 진영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언행 불일치 등의 이중적인 모습을 국민들이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는 염치없는 말 따위는 떠난 그의 그림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무시하고 만다. 그럼에도 서글프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그의 고단함을, 그래서 참 많이 쓸쓸했을 그를,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 은퇴하고 시민의 한명으로 돌아올 줄만 알았던 그런 좋은 사람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니 말이다.

누구의 제안으로 시작된 건 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속했던 당에 부의금을 보내는 일에 동참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부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신혜선 이로운넷 편집장·머니투데이 뉴미디어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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