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인 사회문제들을 남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도전은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이들은 사회혁신가들이다. 아름다운가게, (사)아쇼카 한국, 카카오는 전폭적이지만 매우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사회혁신가들을 발굴하고 경제적 지원과 연대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사회혁신가들이 바꾸는 세상을 함께 따라가봤다

"필요하니까요."

모든 일의 출발점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시동을 걸었다.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었다. 지역의 자원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한 팀을 이뤘고 ‘필요하니까, 힘들어도 해보자’는 공동의 목표가 가장 큰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서울재활병원을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아주 특별한 병원이라고 말한다.

어느 모로 보나 별나긴 했다. 2002년 국내 최초로 소아 낮병동을 만들었다. 낮에 6시간 동안 병원에 머물며 집중 재활치료를 받다가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소아 낮병동 집중 치료실. 소아 환자가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
소아 낮병동 집중 치료실. 소아 환자가 물리 치료를 받고 있다.

"지방 환자들은 물론이려니와 서울의 아이들도 집중치료를 받으려면 꼭 입원을 해야 했어요. 엄마가 아이 곁을 지켜야 하니까 집에 남은 가족들도 못할 노릇이었죠. 낮병동 시스템은 입원하지 않아도 집중치료를 받을 수 있고,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니까 모두가 좋아했어요. 필요해서 무작정 시작한 일이라 당시엔 의료 수가도 없었죠" - 이지선 서울재활병원 원장

 

수익성만 생각했다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지선 원장은 최소한의 치료비만 받고 낮병동 입원료 등의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했다. 몇 년 뒤 의료 수가가 책정되자 소아 낮병동 시스템을 적용하는 병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2006년에는 국내 최초로 청소년 재활 전담팀을 꾸려 통합적 재활의료시스템을 구축했다. 청소년 환자들은 보통 만 12세가 지나면 성인과 같은 곳에서 치료를 받거나 마땅한 치료 서비스 체계가 없어 병원을 전전하곤 했다. 청소년 재활시스템은 소아재활 교과서에 실려 다른 병원에서 보고 배우는 표준이 됐다. 

 

목표는 지역사회 복귀

이지선 서울재활병원 원장은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지역 병원으로 온 뒤 자신이 배운 재활의학과 현실이 너무 동떨어진 점에 놀랐다.

이지선 원장은 소아재활전문의로 지난 23년 동안 서울재활병원에서 재직 중이다.
이지선 원장은 소아재활전문의로 지난 23년 동안 서울재활병원에서 재직 중이다.

"장애를 갖게 되면 가장 큰 문제가 단절입니다. 병원에서 지낼 때와 돌아가 살게 될 삶의 환경이 너무 다른 거죠. 지역재활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치료를 연속해 받을 수 없거나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기 힘든 환경, 심지어 집안에서 조차 활동하기 어려워 방콕하고 지내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회적응훈련입니다."

퇴원하고 나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입원할 때부터 개인별 맞춤형 목표를 설정하고 치료를 진행한다. 기능 향상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지역사회로 돌아갔을 때 잘 지낼 수 있도록  비워진 영역들을 채워가는 데 중점을 둔다.

"우리의 목표는 지역사회로의 복귀입니다. 가령 한 손이 불편한 주부라면 작업치료사가 한 손으로도 조리할 수 있도록 훈련을 진행합니다. 옷 입고 벗기, 바닥에서 일어나기, 청소하기 등의 일상 생활을 남아 있는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잘 지내도록 돕는 훈련이죠. 지역 자원을 연계해 집을 고쳐주기도 합니다."

계단보행 훈련. 치료사가 동행해 병원 밖 걷기 훈련을 하고 있다.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재활병원 주변은 도로 폭이 좁고 경사진 곳이 많다. 차량 통행은 많은데 인도와 차도 구분이 잘 안된 지역이 많다. 이 원장은 "병원 주변을 다닐 수 있으면 서울시내 전체 어디든 갈 수 있다"면서 "난이도별로 코스를 개발해 밖에서 보행훈련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계단보행 훈련. 치료사가 동행해 병원 밖 걷기 훈련을 하고 있다.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재활병원 주변은 도로 폭이 좁고 경사진 곳이 많다. 차량 통행은 많은데 인도와 차도 구분이 잘 안된 지역이 많다. 이 원장은 "병원 주변을 다닐 수 있으면 서울시내 전체 어디든 갈 수 있다"면서 "난이도별로 코스를 개발해 밖에서 보행훈련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쓰는 김정자(가명) 씨는 지하방에 세들어 살았다. 외출하려면 계단이 큰 걸림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의 등에 업혀 오르내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계단을 기어서 내려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원장은 집주인에게 이사 갈때 원상복구를 해준다는 조건으로 램프를 만들어줬다. 이젠 누구의 도움 없이도 김 씨는 휠체어를 타고 외출을 한다.

“처음엔 환자와 그 가족들 심지어 의사인 제 동료들조차 ‘병원이야, 복지관이야, 너희가 왜 그런걸 해?’라고 했어요. 답은 명확했죠. 필요하니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다리가 끊어졌으니까 누군가는 끊긴 다리를 연결해 줘야 장애인들도 지역 안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구슬도 꿰어야 보배

서울재활병원은 2019년 보건복지부와 서울시로부터 민간병원으로는 유일하게 서울시 북부 14개 구를 연결하는 지역 장애인 보건의료센터로 지정받았다. 지역 안에 있는 장애인들의 사례관리와 보건 담당자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교육을 진행한다. 뿔뿔이 흩어진 자원들을 파악해 지도를 만들고 환자들과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잖아요. 지역에는 좋은 자원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혼자서 알아보려면 너무 힘들어요. 이분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지역 자원들을 연결해 줍니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포괄적 재활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거죠.”

서울재활병원은 또 환자 가족을 위한 가족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심리 상담이나 법률 지원, 돌봄 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

“ 자신의 아이가 평생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모들은 큰 충격에 빠지고 이를 수용하기까지 꽤 힘든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 긴 여정의 출발선이 바로 병원인 셈이죠. 우리는 아이들의 귀함을 이야기하고 어려움을 공감해 주고 정서적으로 지지해 줍니다. 마라톤이기 때문에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심리치료사들과 장애 아이들을 잘 길러낸 엄마 멘토들이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아빠와 함께 하는 작업 치료시간. 작업치료사로부터  1대1 코칭을 통해 아이와 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빠와 함께 하는 작업 치료시간. 작업치료사로부터  1대1 코칭을 통해 아이와 노는 법을 배우고 있다. 

주 양육자인 엄마 이외에 아빠와 형제자매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아빠들도 힘들어요. 내 가정의 독특한 어려움을 이해하는 동료들도 거의 없고 터놓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기에 아빠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이번엔 형제자매들이 눈에 밟히더군요.”

이 원장은 “부모의 공백이 많을 때 아이들은 그 자체가 아픔이 되기도 하고 때때로 학교 부적응의 원인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형제자매가 입원하고 집에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2박 3일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가령, 보조기를 차는 일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경험해 보게 하고 이런 힘든 과정을 언니 동생들이 잘 해내고 있으니 응원해 주자는 식이죠.”

이지선 서울재활병원 원장은 평생관리에 초점을 맞춘 지역사회 기반의 재활의료시스템을 만들어 재활병원의 판도를 바꾼 혁신성을 인정받아 2020년 아쇼카펠로우에 선정됐다.

 

새 병원 건립이 꿈

그가 걸어온 길은 곧 재활의학계의 표준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장애는 끝나거나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장애가 있지만 그 어려움을 통과해낸 삶은 정말 값지고 고귀한 것이기에 다시 행복하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재활의 정의입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로 누구나 장애를 입을 수 있기에 장애인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장애인의 절반은 노인이란 걸 아세요? 우리는 누구나 늙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어요.”

그가 말하는 재활은 단지 팔이나 다리의 기능을 좋게 하거나 걷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신체뿐 아니라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존재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장애 소아청소년 학교 복귀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로하야 학교 가자'. 서울재활병원 사회복지사가 로하의 등교에 앞서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중도장애 소아청소년 학교 복귀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로하야 학교 가자'. 서울재활병원 사회복지사가 로하의 등교에 앞서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수요는 존재하지만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그 갭을 메워주는 것이 공공의료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제 꿈은 그 격차를 메워주는 새 병원을 짓는 일입니다. “

그가 역점을 두는 사업이 또 하나 있다. 국제협력 사업이다.

“저희가 소속된 엔젤스헤이븐 사회복지법인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6.25전쟁 고아들을 위한 천막 고아원에서 시작했어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우리는 그분들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젠 우리가 돌려줄 차례입니다.”

이지선 원장이 짐바브웨 현지에서 소아과 차트를 보면서 아이의 발달 상태에 대해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지선 원장이 짐바브웨 현지에서 소아과 차트를 보면서 아이의 발달 상태에 대해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재활병원은 우즈베키스탄을 시작으로 지난 23년간 20개국과 재활의료 국제 협력 사업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업으로 아프리카 짐바브웨 수도에서 진행한 소아 낮병동 구축 사업이 큰 반향을 불러와 현지 정부의 요청으로 전역에 보급하기 위해 올해 말 시스템을 이양할 계획이다.

사진제공 = 서울재활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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