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간 화물을 주고받을 때 주로 이용하는 수단은 ‘선박’이다. 화물의 종류는 자동차 부터 원유나 화학약품 같은 유체 화물, 철광석이나 곡물, 석탄까지 다양하다.

이런 화물선의 규모는 대체로 빌딩 한 채를 눕혀 놓은 수준이다. 너비는 10m 단위로, 길이는 100m 단위로 잰다. ‘톤’ 단위의 화물을 안전하게 목적지로 데려다주기 위해 몇 달간 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해수부가 발표한 ‘2020년 한국선원통계연보’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이런 화물선에 근무하는 한국인 선원은 약 1만 5000명이다.

선박 한 척에 배정되는 인원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20명 내외다. 선장을 필두로 크게 항해를 담당하는 ‘갑판부’와 선박 내 기기의 유지와 수리를 담당하는 ‘기관부’로 나뉜다. ‘항해사’라는 직업은 갑판부에 소속돼 승객이나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운항을 책임지고,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감독·조정한다.

바다의 날을 맞이해, 6년차 항해사 김승주씨(28)와 닿았다. 그는 해양대학교 해사수송과학부를 졸업하고 항해사 커리어를 시작했다. 2019년에는 수필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로 항해사의 삶을 그렸는데, 그해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심사하는 ‘제146차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로도 선정됐다. 출판을 계기로 그동안 북토크, 강연, 방송 출연 등 대외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항해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했다.

김승주씨의 저서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출처=한빛비즈
김승주씨의 저서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출처=한빛비즈

“지금 제가 타고 있는 배는 인터넷이 안 되거든요. 하지만 메일이라면 주고받을 수 있어요.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의 용량은 1MB(메가바이트)를 초과할 수 없어요. 사진 첨부는 안 되고, 글만 가능해요.”

SNS 메신저로 연락한 지 이틀 만에 답장이 왔다. 배에서는 통신이 자유롭지 않다. 마침 한국 주변을 지나는 중이라 인터넷 신호가 잡혀 메신저를 확인할 수 있었단다. 그가 알려준 선박용 메일 주소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배에서 아빠·엄마 역할 맡는 28세 일등항해사

김승주 일항사. 지마린서비스에서 근무 중인 항해사 약 1200명 중 여성 항해사는 15~20명 정도다. 이전 회사에서도 항해사 500명 중 여성은 3명뿐이었다.
김승주 일항사. 그의 뒤로 선적된 컨테이너들이 보인다. 지마린서비스에서 근무 중인 항해사 약 1200명 중 여성 항해사는 15~20명 정도다. 이전 회사에서도 항해사 500명 중 여성은 3명뿐이었다.

책을 쓸 당시 그는 고려해운 소속 이등항해사(이하 2항사)였다. 최근에는 지마린서비스로 이직해 컨테이너선에서 일등항해사(이하 1항사)로 일하고 있다.

1항사는 갑판부의 최고책임자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다. 김승주씨의 설명에 따르면 배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선장 밑에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다.

현재 김승주씨가 타고 있는 선박 선내 구성원 20명의 조직도.
현재 김승주씨가 타고 있는 선박 선내 구성원 20명의 조직도.

김승주씨는 지난해 1월 1항사로 승진했다. 항해사의 승진 과정은 ‘3항사→2항사→1항사→선장’이다. 배 위에서의 승진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3항사에서 2항사로 승진했을 때만큼 기쁘지는 않았다"고 답했다. “한 부서의 장이 돼 갑판부를 이끌고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더라”라며 “2항사 때는 의문이나 특이사항이 있으면 1항사에게 보고를 하면 되는데, 이제는 보고를 받는 자리에 왔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강구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부담감이 크다”고 설명했다. 1항사는 배가 싣고 있는 화물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화물을 가득 실었는데 날씨가 나빠졌을 때는 혹여 컨테이너가 떨어지지 않을까 긴장한다.

주중에는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면 집에 돌아와 쉴 수 있고, 주말은 보장된 휴식 시간인 육지 직장인과 달리, 항해사는 몇 개월을 일터에서 살아야 한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은 없었을까. 김승주씨는 처음 배를 타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때, 실수투성인 자신을 자책했던 순간, 심적·육체적으로 힘들어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 혼자 견뎌야 했던 순간 등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면서도 “배에서 일어난 일이 배 생활을 그만두고 싶다고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어느 곳에서나 힘든 일은 있으니, 고비가 오면 이겨내려는 마음이 더 컸다고 부연했다. 그는 “오히려 예상치 못한 외부 소식을 들었을 때 흔들렸다”며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의 경조사를 함께하지 못할 때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고 덧붙였다.

“저는 저의 일이 좋아요. 언제까지 배를 탈지 종종 생각해보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은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더 알고 싶은 게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요. 스스로 만족할 때 결정하고 싶어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떠올리는 장면이 있는데요, 하얗게 바랜 머리와 자글자글한 주름을 가진 할머니가 된 제 모습입니다. 눈을 감기 직전, 지금을 회상할 때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을까? 대답이 ‘그렇다’라면 아직은 더 해봐야죠. 이런 마음으로 3항사에서 어느새 1항사가 됐네요.(웃음)”

김승주씨가 2항사 시절 탔던 배의 선교./출처=김승주씨 블로그
김승주씨가 2항사 시절 탔던 컨테이너선 선교에서 바라본 바다./출처=김승주씨 블로그

바다 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

국내에서 벌어지는 산업재해에 비해 먼바다에서 벌어지는 인명사고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김승주씨는 안타까웠던 일로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언급했다. 철광석을 싣고 가던 폴라리스쉬핑 소속 스텔라데이지호가 남대서양에서 침몰해 승선원 24명 중 22명이 실종된 사건이다. 대학 동기와 선배가 승선 중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처음 사고가 알려지고는 주목을 크게 받으며 따로 찾지 않아도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다 며칠 후에는 점점 관심도가 떨어져 기사를 따로 검색해야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김승주씨는 “그들의 노고와 희생이 아무도 모르게 증발해버리는 것 같아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그는 항해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안전’을 꼽는다. 개개인이 다치는 일마저 조심해야 한다. 육지에서였으면 빠르게 근처 병원을 찾으면 되지만, 배 환경은 그렇지 않다.

“한 선장님과 식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에요.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망망대해에서 선원 한 명이 일하다 손을 베어서 출혈이 심했대요. 육지까지는 몇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고, 헬기가 오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상황이었어요. 현장에서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배에는 학교 보건실과 비슷하게 생긴 병원이 따로 마련돼 있어요. 각종 의약품과 비상약, 간단한 수술 도구가 있죠. 수술용 바늘과 실로 선장님께서 직접 꿰맸대요. 대학교 때 배웠지만 실제 봉합은 처음 해보셨다고 해요. 항구에 도착해 들른 병원에서 의사가 ‘도대체 누가 꿰맨 거냐’고 물어봤대요.(웃음) 상처는 잘 아물었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다들 제때 병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하고 배에 올라요. 그래서 더욱 안전을 중요시하죠.”

“‘바다의 날’ 맞아 해운업 동료들 조명받았으면”

김승주씨가 승선 중인 선박 'NAVIOS UNISON.'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약 1만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화물선이다./출처=VesselFinder

그는 저서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 집필 당시에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항해사 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인지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같은 업계 종사자들에게 출판 소식을 알리기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배를 더 오래 탄 사람들도 있는데, 부족한 견해로 글을 썼다가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고 회상했다.

“걱정과 다르게 축하를 많이 받았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해기사(편집자 주: 항해사와 기관사를 통칭하는 표현)가 하는 일을 잘 모르는 지인과 가족들에게 알려주기 딱 좋은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기뻤어요.”

바다의 날을 기념해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모두 건강하고 안전하게 배를 탔으면 좋겠어요. 그럼 볼 수 있는 날이 꼭 올 테니까요.”라고 답했다. 육지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배 타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어렵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끼리는 더 보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휴가 시기가 안 맞으면 몇 년을 못 볼 수도 있다.

김승주씨는 답변지 하단에 빨간 글씨로 “저는 이 인터뷰를 통해 저만 주목받는 건 싫습니다. 바다의 날인 만큼 뱃사람들을 포함해 해운 분야에 종사하시는 많은 사람이 조명을 받았으면 좋겠어요.”라고 강조했다. 빠르면 올해 11월, 늦으면 내년 초에나 휴가를 나올 수 있다는 김승주 1항사. 그를 태운 12만톤의 컨테이너선은 지금도 태평양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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