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기점으로 전 세계가 바이러스를 본격 학습했다. 사람들은 손을 씻고 마스크를 끼는 게 감염 방지에 '정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바이러스를 다룬 재난 영화가 역주행하고 관련 책 판매량도 늘었다.

코로나19로 생긴 ‘바이러스 붐’과 상관없이, 20년 가까이 바이러스만 파온 과학자에게 요즘 같은 시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난 22일, 바다 건너 미국 애틀랜타에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문성실 박사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지난 4월 말, 첫 단행본인 ‘사이언스 고즈 온’을 출간했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여성, 엄마,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이야기를 담았다.

'사이언스 고즈 온' 표지./출처=알마
'사이언스 고즈 온' 표지./출처=알마

바이러스 전공한 이유는 "매력적이라서"

문 박사의 전문 분야는 ‘로타바이러스’다. 정확히는 로타바이러스의 백신을 연구한다. 석사, 박사 학위도 로타바이러스 관련 논문으로 받았다. 설사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인데, 주로 2~3세의 영유아에서 발생한다. 환경에 따라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질병이지만, 지금도 세계에서 매년 10만5000명 넘게 이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는다.

이미 백신이 있다.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80%~90% 효과를 내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효과가 60% 언저리라는 게 문제다. 영양 상태,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환경, 면역 상태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문 박사의 역할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듣는 백신을 만드는 거다. 개발도상국에서도 상용화될 수 있게 가격도 낮춰야 하는 미션이 있다.

미생물학자 문성실 박사와 지난 22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 박사에게 과학계 여러 전공 중 왜 바이러스를 택했는지 물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매력적인 존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전자와 단백질로만 구성돼 있는데,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숙주에 붙으면 살 수 있는 특별한 미생물이 바로 바이러스다. 인류를 괴롭히는 바이러스를 극복하는데 기여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작년 코로나19 진단에 관한 실험실 지원에 자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에볼라와 메르스 유행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 박사에게 요즘 같은 분위기는 새롭다.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바이러스 교육을 받고 있다. 또, 그는 코로나19 백신을 두고 “이렇게 전 세계가 간절하게 염원하는 백신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SNS에 공유하는 바이러스 관련 글과 논문에 꽂히는 관심도 눈에 띄게 늘었다.

평범한 여성이자 엄마, 그리고 외국인 과학자의 삶

문 박사는 그동안 SNS에 글을 올리거나 언론사, BRIC(포항공대 생물학전문연구정보센터) 등에 기고해왔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9년, 알마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고서다. 알마 출판사는 베스트셀러 과학도서 ‘랩걸’을 내놓은 곳이다. 미국인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Hope Jahren)의 자서전이다. 출판사 측에서는 한국인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싶다며 연락해왔다고 한다.

"평범한 삶을 사는 과학자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엄청난 업적을 세운 영웅 말고요, 저 같은 사람이요."

문 박사는 매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백신 품질평가를 위한 실험을 반복한다. 어떤 날은 실험실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7000보를 걷는다. 이런 하루하루가 모인 평범한 과학자의 삶을 살며 조금씩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책에도 나타난다.

나의 과학은 새롭게 만든 백신이 동물에서 얼마나 높은 면역 효과를 나타내는지 백신의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해 검사를 하고, 백신을 접종하는 혁신 기술을 응용하는 연구다. 최신 트렌드를 선도하는 기술이나 연구는 아니며, 영향력지수가 높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실을 만큼 혁신적이거나 대단한 과학은 아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과학이다.

문성실 박사가 직접 그린 그림. 실험실에서 연구 중인 본인의 모습을 담았다.
문성실 박사가 직접 그린 그림. 실험실에서 연구 중인 본인의 모습을 담았다.

책에는 문 박사가 여성이자 엄마,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겪는 일도 담겨 있다. 가장 공들여 쓴 부분이 어디냐 묻자 “여성 과학자 챕터”라 답했다. 해당 챕터에는 여자 선배들이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느낀 씁쓸함, 페미니스트 과학자로서 실감하는 여성 연대의 필요성 등을 담았다. 문 박사는 여기서도 반짝이는 별 같은 ‘롤모델’보다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될만한 여성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강조한다. '롤모델보다 레퍼런스'는 출판사 진저티프로젝트가 만든 인터뷰집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질문과 답을 담았다.

최근 재미여성과학기술자협회에서 '올해의 뛰어난 여성 과학자 상(Outstanding Women Scientist Award)'를 수상한 문 박사. 낯선 타지에서 가사, 육아, 연구를 병행하는 그의 존재 자체가 후배 여성 과학자들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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