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디 계속 그 아이 얼굴이 생각나질 않아. 한 번도 그 얼굴이 안 떠오릉게 미안한 거여. 갸가 피를 콸콸 쏟아내는디 병원에 데려다는 줬지만 아마 살아나지는 못했을 것잉께.”
1980년 5월. 시민군에 가담했던 곽희성 씨는 광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고등학생을 후송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살려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수많은 희생자들 사이에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30년 넘게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젠 마음의 짐을 조금씩 덜어내며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라는 자부심을 회복했다.
그가 상처와 대면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사진’이다. 곽 씨는 사진을 ‘보는’것이 아니라 ‘찍는’ 행위로서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다. 그 곁에는 ‘공감아이’가 있다.
공감아이는 ‘사람이 우선인 사진’이란 가치를 내걸고 국가폭력이나 부실한 사회안전망에 따른 심리적 피해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사진심리치유 전문 기업이다.
2016년 서울 시청 갤러리에서는 ‘기억의 회복’이란 이름의 오월 광주 치유 사진전이 열렸다. 공감아이가 심리 상담을 진행했던 5.18관련 피해자들이 직접 찍은 사진들이다.
“끔찍한 기억이 담긴 공간과의 대면은 자신의 상처와의 대면을 뜻합니다. 자신을 고문했던 장소, 동료가 죽은 장소 등과 마주치면서 그분들이 가졌던 분노와 두려움을 재해석하고 전환해가는 선상에 제가 늘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상담자로서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고 힘겨울 때 보듬어 드리는 겁니다.“ - 임종진 공감아이대표
사진심리치료는 3단계로 진행됐다. 가장 고통스럽고 자존감이 무너졌던 공간과의 대면이 첫 단계로 그곳에 이르기까지 평균 7개월 이상이 걸렸다.
“ 당시 상황을 재현한 광주 상무대에 가면 일반인들은 밖에서 그냥 둘러보지만 이분들은 달라요. 밀랍인형의 밑으로 몸이 확 들어가 올려서 찍습니다. 본인이 느꼈던 공포감을 표현하는 것이죠.”
고통의 장소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 스스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은 서서히 옅어졌다. 곽 씨는 36년여 만에 망월동 신묘역을 참배하고 741기의 유공자 봉분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36년 만에 첨으루다가 모든 분들한테 인사를 올렸습니다. 눈물이 찡하게 나오드만요. 나가 여기 신묘역을 찍은 이유는 우리가 다 죽고 나서도 이건 남을 거 아니요. 제대로 보호하고 남겨야지라.”
임종진 공감아이 대표는 “상담을 하고 치유자로 일하지만 극한 상황에까지 내몰렸던 고통은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다만 조금씩 덜어내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상처와의 대면 후에는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소중한 가족들, 고향, 어릴 적 추억의 장소, 드넓은 바다 위에서 낛시, 산행처럼 일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단계로 발전한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분들은 그동안 유희적인 행동이 누가 된다고 느껴져 망설이고 주저했던 일들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치유자의 시선이란 이름으로 피해자들이 심리적 치유 과정에서 보여준 정점의 순간을 기록해 자존감을 더욱 끌어올려 주는 일이다.
공감아이는 오는 6월에는 간첩이란 누명을 뒤집어쓴 채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했던 조작간첩단 피해자 6분의 사진전도 열 예정이다.
서울혁신파크 상상청 3층. 공감아이 사무실 입구엔 양옆으로 두 사진이 말을 건다. 한쪽엔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조작간첩단 피해자 6명이 환하게 웃고 있고 또 한켠엔 한 여자아이가 동생을 등에 업고 그윽한 미소를 보낸다.
두 사진은 공감아이가 추구하는 양대 사회적 미션을 말해준다. 공감아이의 또 다른 사회적 미션은 바로 국제 개발협력 분야에서 빈곤 포르노를 몰아내고 대안적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안적 이미지란 무엇일까.
“ 우리는 성금을 모으기 위해 소위 빈곤 포르노라고 하는 동정심만 자극하는 이미지들을 사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야 지갑이 열리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공감아이는 몇해 전 한 카톨릭계 국제구호기관으로부터 개발도상국 주민들을 위한 돕기 위한 모금행사에 사용할 사진을 요청받았다. 임 대표는 캄보디아 소수민족인 프농족의 칭메이라는 어린이가 동생을 업고 지긋이 미소 짓는 사진을 건넸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금 모금은 성공적이었다.
“ ‘맨날 다 죽어가는 아이들만 봐서 힘들었는데 저 아이의 미소가 너무 좋았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제3세계나 아프리카, 개도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은연중에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가난, 기아, 전쟁처럼요. 사진이 그런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전 그런 경계선을 풀고 그들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부각시켜나가려고 합니다.”
임 대표는 사진작가로서 이미지를 창출하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기업과 국제협력기관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고 DB를 구축하는 사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다.
임 대표는 공감아이를 창업하기에 앞서 사진기자로서 재난과 전쟁의 현장을 누볐다. 2003년 이라크전 취재를 다녀온 후 공허한 마음에 캄보디아로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떠났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떠날 때는 ‘악수를 먼저 청하고 친구가 돼줄게’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하고 퀭한 눈의 환자를 맞닥뜨린 순간 손을 내민 게 아니라 몸이 확 뒤로 빠지더군요. 그 순간 저의 한계와 허위의식, 오만함을 느꼈고 무척 미안했습니다. ”
그는 귀국 후 수원정신보건센터에서 진행한 후천적 정신장애인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에서 사진치료의 가능성을 체험하고 사진심리상담 공부에 매진했다.
“ 당시 제 목표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그분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거였어요. 그분들이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하면서 짤막한 엽서 쓰기를 했는데 한 분은 닫힌 문을 열어보고 싶다 했고 또 다른 분은 그늘진 곳에서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 건너가고 싶다고 했어요. 제 가슴은 뜨거워졌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감아이의 이런 활동들은 사회적 공공성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사회적기업가 육성과정 7기에 선정됐다. 공감아이는 작년 11월 법인을 설립하고 사회적기업가가 되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밟아가는 중이다. 임 대표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 돈을 쏟아부으며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이젠 든든한 동료가 생겼다.
동료 하동훈 씨는 임대표의 사진 강의를 듣곤 그의 사진 철학에 매료돼 공감아이에 합류했다. 그 역시 임 대표를 만나기전부터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은 '아프리카인사이트'란 아프리카 국제협력 및 옹호 시민사회 단체가 공모한 사진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아픈 이들의 눈빛과 내면의 감정을 살피는 시간들이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잠깐씩 일그러진 심장소리가 들려올 때면 우리는 소리 없이 손을 내밀어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들은 이내 힘을 되찾았습니다.” -- 공감아이 소개 리플릿 중에서
공감아이는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사진 치유자 양성과정’을 개설해 보다 많은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곁을 지켜주는 곁지기가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글. 백선기 이로운넷 책임에디터
사진. 이우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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