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노동 뿐일까? 장애인들은 수동적인 일만 해야 할까?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일할 수 없을까? ‘느린 창덕궁 투어’는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꿈앤컴퍼니(대표 박대수), 가이드쿱(대표 호기헌), 구립동대문장애인종합복지관(관장 정은아)이 의기투합했다. 

김주희 가이드는 동대문복지관에서 직업적응훈련생으로 6개월 간 교육을 받고 가이드쿱의 직원으로 창덕궁 투어 가이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근로자로 채용해 기업을 운영하는 사례는 많이 접했다. 투어 가이드 라는 기존과 조금 다른 형태를 접하고 '운영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기자는 지난 4월 14일 창덕궁으로 향했다.

김주희 가이드가 투어를 진행하는 모습
김주희 가이드가 투어를 진행하는 모습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투어를 진행할 김주희 가이드입니다. 오늘 가장 중요한 건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 세 번째도 안전입니다. 자, 우리 선생님들! 선생님들도 우리 고객님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안내해 주세요. 조심해서 저를 따라와주세요.”

발달장애인인 김주희 가이드가 진행하는 느린 창덕궁 투어에 함께하기 위해 관악구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인들이 창덕궁에 모였다. 본격적인 투어 시작 전, 입구인 돈화문에서 가이드 무선 송수신기를 목에 걸었다. 투어는 돈화문부터 금천교, 인정전, 희정당 등을 거쳐 낙선재까지 1시간 30분 코스로 이어진다.

진선문부터 이어지는 삼도
진선문부터 이어지는 삼도

왕의 길 어도를 지나...업무공간인 인정전을 둘러보다

고즈넉한 평일의 창덕궁이 김 가이드의 설명으로 활기를 찾았다. 그는 금천교 아래를 참가자들과 함께 내려다보며 해태와 거북이를 설명했다. 앞서 힌트를 주며 동물의 이름을 맞힐 수 있도록 참가자들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 몇몇 관광객은 김 가이드의 설명을 유심히 듣기도 했다. 

진선문을 지나 인정전까지 이어지는 길인 ‘삼도’는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낮은 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은 부분은 왕이 걷는 어도고 양옆은 신하가 다니는 길이다. 양옆은 문반과 무반이 나뉘어 걸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왕이  되고 싶으신가요? 신하가 되고 싶으신가요? 바라는 대로 길을 걸어보세요’라는 그의 말에 자유롭게 걷던 사람들이 재빨리 어도로 올라섰다. 몇몇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다 신하의 길로 내려서기도 해 웃음꽃이 번졌다.

인정전 앞에서 드므를 설명하는 김주희 가이드(투어는 방역규칙을 준수해 진행되었습니다)
인정전 앞에서 드므를 설명하는 김주희 가이드(투어는 방역규칙을 준수해 진행되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그는 막힘없이 창덕궁 내부를 설명해 나갔다. 인정전에 도착해 앞쪽에 있는 항아리 같이 생긴 ‘드므’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드므는 일종의 액운을 쫓는 장치다. 주로 화재예방이 목적이다. 김 가이드는 “불귀신은 얼굴이 무섭고 못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도망가도록 드므를 놓았다”며 “임금님이 일하는 공간에 불이 나면 안되기 때문에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낙선재 돌담의 거북무늬를 설명하는 김주희 가이드 
낙선재 돌담의 거북무늬를 설명하는 김주희 가이드 

“여러분 잘 쉬셨나요? 오늘 투어 어떠세요? 재밌으신가요? 대답이 좀 작아서 아닌 것 같아요. 오늘 재밌으신가요~”

창덕궁 내 유일한 청기와 건물인 선정전의 지붕 설명을 시작으로 2부 투어가 이어졌다. 2부는 낙선재를 꼼꼼히 살핀다. 낙선재에 들어서기 전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공간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내부를 둘러보며 낙선재의 역사와 고종 황제, 경빈 김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육각형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흰색 돌담벽도 그냥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벽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무늬로 꾸몄다”며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의 건강을 바란 것”이라고 말했다. 외에도 개인 사진촬영 등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김주희 가이드가 금천교 위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투어는 방역규칙을 준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주희 가이드가 금천교 위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투어는 방역규칙을 준수해 진행되었습니다)

1km가 채 안되는 코스가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지며 마무리 됐다. 그는 쉬는 시간에 담당자와 함께 고민했던, ‘꽃이 많은 예쁜 공간에서의 마무리’도 완벽하게 성공했다. 투어에 참가한 홍경희 관악구장애인종합복지관 장애인재활상담사는 “투어를 재밌게 진행해주신 가이드님께 감사드린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느린 창덕궁 투어 포스터/출처=(주)꿈앤컴퍼니
느린 창덕궁 투어 포스터/출처=(주)꿈앤컴퍼니

발달장애인의 진로와 직무체험 더 다양해졌으면

“가이드 업무가 제 스트레스를 해소해줘요.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것도 좋아요. 이렇게 투어가 끝나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코코아를 마시는것도 즐거워요.” - 김주희 가이드

느린 창덕궁 투어는 2년 간의 준비를 통해 오픈했다. 오픈기념으로 진행한 이번 프로모션 투어는 15개 기관 100여 명이 참가했다. 각 지역과 기관에서 탐방 문의도 하루에 1~2건씩 오고 있다. 아직까지 발달장애인이 직업을 찾는 과정은 어렵다. 현실적으로 발달장애인의 적성을 반영해 진로를 준비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발달장애인이 근무가능한 업무는 정형화 돼 있다.

박대수 ㈜꿈앤컴퍼니 대표는 “발달장애인 중에는 활동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이 있다”며 “이런 강점을 직업으로 살려 발달장애인의 직군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가이드’라는 직무도 매뉴얼화 해 창덕궁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자리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꿈앤컴퍼니와 가이드쿱은 발달장애인 관광 가이드 사업의 안정과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구립동대문장애인종합복지관과 연계해 가이드 양성 과정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교육 매뉴얼, 영상교육 강좌 등 콘텐츠 개발을 통해 직접 참여가 어려운 지역도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어를 통한 수익은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더 많은 발달장애인 관광 가이드가 양성됐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전국의 명소를 발달장애인의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투어가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 - 박대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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