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산, 밤나무 4형제 이야기

 

개명산(開明山)자락아래 벽제동에는 내가 속한 고양시도시농부네트워크(고도넷)회원들이 일구는 천평남짓한 텃밭과 원두막이 있다. 이곳은 사시사철 풍광이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좋은건 입하를 앞둔 이때이다. 이때가 되면 개울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고 지렁이들이 꿈틀거리고, 밭에는 참외꽃이 피기 시작한다.

해질녘 나홀로 풀 뽑기에 땀을 흘리다가 막걸리 몇 잔 들이키고 원두막에 누었다. 원두막 바로 앞에는 하얗게 말라죽은 밤나무 네 그루가 벌건 저녁놀을 받고서 마치 사람이 해골만 남아있으나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형상으로 서 있다.

지금까지는 그저 고사목으로만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쳤는데 자세히 보니 네그루 나무 모두 허리부분이 깊이 3~4cm 폭 30cm 정도로 파여있었다. 뭔지모를 기괴한 느낌이 들어 고목(枯木) 네그루를 넋 잃고 바라보는데 문득, 땅속에서 간장을 사르는 듯한 처연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매로 입을 막고 울음을 삼키는 듯한 서글픈 흐느낌이 계속 들려 원두막 아래를 들여다 보았다. 호미와 갈퀴, 쇠스랑, 삽괭이 등이 쌓여있는 어두운 틈새에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빡빡머리 동자 넷이 주저앉아 애처롭게 흐느끼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울음을 멈추고 무언가 호소하려는 듯 그렁그렁 고인 눈을 깜박인다. 그 모습을 보니 까닭 모르게 절로 슬퍼져 그들에게 사연을 물었다.

"본래 우리는 이 앞 밤나무의 정령(精靈)으로 밤나무와 같이 태어나 같이 죽어야 하는 운명입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인 밤나무가 너무나 어이없고 억울한 죽임을 당하여 그 혼인 우리는 구천(九泉)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께서 우리의 죽은 모습을 보고 가련히 여기는 느낌을 받았기에 그만 서러움이 복받쳐 울게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나는 그들을 원두막 위로 불러내어 막걸리를 권하고서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듣고자 청하였다.
 

왼쪽-중간 허리부분이 동그랗게 파여 말라죽은 밤나무, 오른쪽-벽제농원 원두막

자신을 형제 중 맏이라고 칭한 정령이 주저하면서 사연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우리 유전자의 뿌리는 1968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석추밤 입니다. 1958년 이 땅의 토종 밤나무는 외래해충인 밤나무 혹벌로 전멸하기에 이르렀기에 해충에 강한 품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곳 개명산자락 벽제동에 보급된 석추밤의 2세가 우리형제입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수녀님들이 자급자족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수녀님들은 소박하고 검소하실 뿐만 아니라 텃밭도 자연그대로 가꾸셨습니다. 덕분에 이곳의 생태는 아주 양호합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종(種)은 다른 종들을 절멸시키는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건 발을 디디는 순간 다른 생물종들은 자취를 감추거나 멸종당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겨우 사방 10리 떨어진 곳에는 꿩이나 참새는 물론, 까치나 두루미 등의 야생 조류를 찿아 보기 어렵습니다. 농약에 중독된 새는 더 이상 단단한 알껍질을 만들어 낼 수 없게 되어 먹이사슬이 붕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살아남은 놈들의 암수균형은 기형적으로 깨져있습니다. 스스로 유전적 변형을 일으켜 수컷보다 암컷을 몇 배 더 많이 낳게 했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자손을 많이 늘리기 위해서 입니다. 알을 많이 낳기 위해서는 암컷이 많아야 합니다. 인간이 없는 곳의 개구리는 암수비율이 비슷합니다. 이런 유전변이 현상은 이곳 개명산 소나무에서도 두드러집니다. 이 곳 소나무의 솔방울은 강원산간 청정한 지역의 그것보다 솔방울 개체수가 훨씬 많습니다.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려는 것이지요.”

“여름한철 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심 속 공원의 매미는 번식을 위해 그야말로 사력을 다합니다. 짝을 부르는 울음소리는 조용한 산속 매미의 그것보다 몇 배 크고 처절합니다. 토양, 공기, 수질 등의 오염이 수십 해에 걸쳐 시나브로 진행되는 위기에 적응하려고 사력을 다하면서 이들은 닥쳐올 멸종이라는 대재앙에 대비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시의 인간 암컷이 무의식중에 먹는 것에 열중하는 이유도, 폐병 걸린 인간수컷의 성욕이 급격히 높아지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에 처한 것을 몸이 알기 때문에 자손을 서둘러 많이 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곳은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수녀님과 오염되지 않은 먹거리를 가꾸려는 도시농부 덕분에 토양과 수질이 건강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금수저까지는 아니라도 은수저는 물고 태어난 셈입니다. 비록 날마다 우리 주위에 내려앉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먼지 중에 죽음과 질병을 일으키는 것들이 많아져 가지만 그래도 우리 형제는 이곳에서 깊이 뿌리내리며 별 탈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왼쪽-수분관이 잘려 고사한 밤나무형제, 오른쪽-원두막아래 농기구들

이어 둘째가 하소연하듯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식물은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할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중력, 자기장, 습도를 감지하고 수많은 화학물질을 분간해 낼 수 있습니다. 뿌리와 잎이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다른 식물과도 의사소통을 합니다. 친척을 알아보고 친척끼리 협동하여 위기를 극복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동물들과도 의사소통을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가지를 꺾으려고 다가오면 우리의 모든 조직은 비상상태로 전환됩니다. 그가 톱이나 낫 같은 기구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의도를 감지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녹음이 주는 상쾌함에 좋은 감정을 지니고 다가오면 우리의 성장점이 한층 활발해지는 이유도 우리의 뛰어난 감각 덕분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능력을 알아보는 인간도 있습니다. 재주 있는 탁발승은 시주를 받으려 가는 집의 나무를 보고 문을 들어설지 지나칠지를 판단합니다. 유독 열매가 많이 열린 은행나무가 있는 집은 피해갑니다. 그 나무의 집주인은 생명을 존중하지 않을뿐더러 배려심이나 고마움을 모른는 수전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오랜세월 그와 함께하면서 그가 언제라도 자신을 베어버릴 수 있음을 압니다. 때문에 살아있을 때 자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 기를 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도 살고 계신 동네 가게 앞의 은행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으면 그 앞의 가게주인이 그 나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능은 대체로 뿌리에 몰려 있습니다. 뿌리의 말단, 즉 근단이 인간의 뇌역할을 합니다. 아주 작은 잡초조차 수천만 개의 섬세한 감각기관인 근단이 있고, 각각의 근단에는 소리와 진동,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농도, 기온 등 수만가지의 정보들이 입력됩니다. 근단은 이러한 입력된 정보들을 분석하여 식물의 각 부분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검토하고 방향을 결정합니다."

“수천만에서 수억 개의 근단들은 각각 따로 놀지 않고 집단적으로 행동합니다. 인간 세계의 컴퓨터네트워크와 같은 분산지능을 진화시켜온 것입니다. 이렇듯, 지능으로 따지면 인간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인간은 머리(뇌)를 땅에 두지 않고 거꾸로 허공에 두고 다니는 불편해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무가 보는 인간의 수명은 발밑의 이름 모를 잡초보다 짧아 보입니다. 힘에서도 식물은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뿌리에서 지상부 맨 끝의 잎사귀까지 수분과 각종 영양소를 끌어올리는데 나무하나가 가지는 에너지는 인간 고층아파트 지하에서 꼭대기까지 물을 끌어올리는데 쓰이는 에너지를 훨씬 능가합니다.”

[2편에서 계속]

글. 고양시도시농부네트워크 윤병훈 이로운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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