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에서 독립문역으로 가는 길. 사직단을 지나 가파른 경사를 오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하나 훔치면 옹기종기 모인 빌라와 주택이 보인다. 그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벽돌 가옥. 머릿돌에는 “DILKUSHA 1923”이라고 각인돼있다. 1923년에 지어져 약 100년의 역사를 품은 등록문화재 제687호 ‘딜쿠샤’다.

100년 된 집인데 기와집이나 초가집도 아닌 양옥이다. 딜쿠샤라는 이름은 고대인도의 표준문장어인 산스크리트어고, 집에 살던 가족은 미국인이었다. 외국인 가옥이 어떻게 문화재가 됐을까?

딜쿠샤 전경.
딜쿠샤 전경.

행촌 한복판에서 3·1절 역사 품은 서양식 저택 ‘딜쿠샤’

딜쿠샤는 일제강점기 광산 사업가 겸 미국 연합통신의 임시특파원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그의 가족이 살던 집이다.

예부터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서울 종로구 행촌동. 은행나무에 마음을 뺏긴 테일러 부부는 1923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가옥을 완공했다. 이름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 메리 테일러가 인도에서 방문했던 궁전 이름과 같게 지었다. 테일러 가족은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으로 쫓겨난 1942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저택은 이후 장기간 방치됐다.

25일 서울시가 진행한 딜쿠샤 프레스 투어에서는 전시관으로 복원된 저택이 처음으로 베일을 벗었다. 서울시는 2018년 11월 원형 복원 공사를 시작해 작년 말 완료했다. 기자는 현장을 방문해 딜쿠샤가 담은 역사를 들여다봤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는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딜쿠샤’는 2017년 8월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됐다.

“딜쿠샤는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보여줍니다. ‘공동벽 쌓기’라는 벽돌 쌓기 방식을 적용해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있죠. 벽돌의 넓은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에서는 유사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안미경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앨버트 테일러는 일제강점기 당시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통신원이다. 딜쿠샤는 집주인의 이러한 공과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문화재로 등록됐다.

서울시는 삼일절을 맞이해 '딜쿠샤 전시관'을 개방하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긴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열며, 입장료는 무료다.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한 해설 관람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1일 4회 관람이 진행되며, 1회당 관람 가능 인원은 20명이다. 사전 관람 예약은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제니퍼 L. 테일러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이자 유물을 기증한 장본인이다.
제니퍼 L. 테일러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이자 유물을 기증한 장본인이다.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L. 테일러는 프레스 투어 현장에서 “3·1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한국인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며 “이번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투쟁에 연대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테일러 부부의 한국사랑

딜쿠샤 전시관은 저택 1층과 2층에 조성됐다. 두 층의 구조는 거의 같다. 안미경 학예연구사는 “남아 있던 사진 자료를 활용해서 1920년대 테일러 부부의 거주 모습을 고증해 1·2층 거실을 재현했고, 거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는 부부가 한국에서 생활했던 모습과 앨버트 테일러의 언론 활동을 주제로 전시실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일회용 부직포 덧신을 신발에 끼고 현관에 들어서니 19세기 영미 소설에서 만날 법한 집안 풍경이 보인다. 널찍한 거실에 괘종시계, 벽난로, 고풍스러운 식탁과 의자, 은촛대까지. 벽난로 위에는 가문 문장도 있다. 지인을 초대해 연회를 즐기던 공간이라는 학예사의 설명에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한다.

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 초상화와 금강산.
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 초상화와 금강산.

집 곳곳에는 한국을 사랑한 테일러 부부의 흔적이 보인다. 1층에는 거실 외에도 3개의 방이 있는데, 각각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한국 입국,'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 '딜쿠샤로의 귀향'이라는 주제로 꾸며져 있다. 방으로 가면 메리 테일러가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 직접 그린 금강산과 금광 그림 등을 만날 수 있다. 금강산 그림 뒤편에는 제목인 건곤감리가 영어 번역으로 ‘Air, Earth, Water, Fire(공기, 땅, 물, 불)’라고 적혀있다. 익숙한 한국 풍경을 담은 작품이 미국인 손에서 나왔다니, 묘하다.

딜쿠샤 2층 거실.
딜쿠샤 2층 거실.

“이 응접실이야말로 우리 집에서 제일 중요한 곳으로 딜쿠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아끼는 물건들과 여가를 즐길 만한 것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울 때는 대나무 기둥 위로 자라난 등나무 덩굴이 테라스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하늘색으로 칠한 방도 마치 계곡처럼 초록빛이 되었다.”

메리 테일러의 전기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 속 내용이다. 부부가 여가의 대부분을 보내는 2층 거실 응접실은 중앙의 벽난로를 중심으로 앨버트 테일러가 수집한 고려청자들, 도자기 말 모형, 석류와 연꽃이 수 놓인 병풍으로 꾸며졌다. 사진 자료를 참고해 재현했는데, 알록달록 동서양의 특징이 섞였다. 지금은 테일러가의 후손이 기증한 유물을 전시해뒀는데, 추후 복제 유물로 교체할 예정이다.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스 실린 3·1운동 기사.
1919년 3월 13일자 뉴욕타임스 실린 3·1운동 기사.

2층 방에는 통신원으로 활약한 앨버트 테일러의 모습이 전시됐다. 한국 소식을 해외에 알린 그의 업적을 당시 기사와 편지 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월 1일, 아내가 입원 중이던 세브란스병원에서 침대 속에 숨겨진 독립선언서를 우연히 발견해 즉시 관련 기사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고, 이는 뉴욕타임스 기사로 나왔다. 이 외에도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가 재판 등을 취재했다.

테일러 부부는 일본의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1942년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강제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모국으로 돌아갔지만, 항상 한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던 그. 미국 국무부와 특수부대에 자신의 경력과 한국어 능력을 어필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2층 전시관에 전시된 편지에는 앨버트 테일러가 다시 한국에 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담겼다. 그러던 중 그는 19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훗날 메리 테일러가 유해를 들고 한국으로 와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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