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무이자·무담보로 대출해주고, 대출신청자 신용조회도 하지 않는 은행이 있다.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 단지 정말 필요한 사람, ‘장발장’에게만 돈을 빌려준다. 돈은 오롯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 쓰인다.

2015년 2월 설립된 장발장은행은 인권연대가 ‘가난이 죄’가 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설립됐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빌려준다. 현행법은 벌금형이 확정된 뒤 한 달 안에 벌금을 완납하지 못하면 교도소에서 노역으로 벌금을 탕감하도록 하고 있다. 가령 300만원 벌금을 선고받았다면, 교도소 노역 하루당 10만원씩 차감해 30일간 갇히게 된다.

장발장은행은 사회적 모성을 품은 따뜻한 은행이다. 사회적 모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홍세화 은행장은 “가난한 자가 죄인인 사회는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며 “가난한 자에게 따뜻함을 선사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발장은행은 지난해 12월 21일, '코로나19 시대, 노역장 유치를 멈춰달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인권연대 페이스북 갈무리
장발장은행은 지난해 12월 21일, '코로나19 시대, 노역장 유치를 멈춰달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인권연대 페이스북 갈무리

사회적 모성으로 삭막한 세상에 온기를 더하고 있다.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코로나19 대량확진 사태가 발생한 지난해 12월 21일에는 ‘코로나19 시대, 노역장 유치를 멈춰달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를 통해 "벌금 낼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단지 돈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은 형사정책의 심각한 잘못"이라며 "지금의 구금시설이 방역에 취약성을 드러낸 만큼, 코로나19 사태가 안정화될 때까지라도 벌금 미납자에 대한 환형유치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장은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 작가가 설립시점부터 맡고 있다. 그는 지난해 출간한 ‘결 : 거칢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나를 짓는 자유’를 강조했다. 나를 짓는 자유는 장발장은행의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홍 은행장은 나를 짓는 자유에 대해 "우리가 몸을 가꾸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짓는 자유가 필요하다는 의미”라며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지을 것인가를 고민할 때 철학적 가치관도 중요한데, 기본적인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 물적 토대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출처=소박한 자유인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출처=소박한 자유인

1979년 난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초창기, 그 역시 물질적 가난 속에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가난해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를 짓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장발장은행의 활동도 “모두의 나를 짓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이로운넷은 작가·언론인·정당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세화 은행장을 만나 장발장은행에 대해 묻고, 사회 현안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다음은 홍세화 장발장은행장과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일문일답.

Q. 장발장은행을 소개해달라.

- 국가로부터 벌금형을 선고받은 수형자들이 벌금을 못 내면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 한다. 이런 분들이 워낙 많아서 벌금을 못 내는데 몸으로 때울 처지도 못 되는 분들에게 무담보·무이자 신용조회없이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다.

Q. 대출자격은.

-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람이면 누구든 대출대상이 된다. 다만 시민의 성금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대출심사를 해 제한적으로 대출을 해주고 있다. 최대 300만원까지 대출해주며 6개월 거치 후 1년 분할상환이 가능하다. 

Q. 대출심사는 어떻게 진행되나.

- 신청자는 벌금관련 정보, 신청금액, 상환계획 등을 적어 대출신청서를 제출한다. 은행장인 저를 비롯해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민갑룡 전 경찰청장,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6명의 대출심사위원이 신청서를 꼼꼼히 살펴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신청은 많지만, 재원은 한정돼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기반으로 결정한다. 특히 미성년자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분들에게 우선적으로 대출을 해드리려고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는 집안 형편이다. 부양가족이 있고, 집안이 가난한 경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청년이다.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된 이들이 감옥에 가는 일은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에서다. 반대로 성폭행이나 가족폭행, 음주운전 등 죄질이 나쁜 범죄를 저지른 이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대출심사를 하다보면 가난해서 죄를 짓게 된 경우가 많이 보인다"며 "그럼에도 상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밝혔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은 "대출심사를 하다보면 가난해서 죄를 짓게 된 경우가 많이 보인다"며 "그럼에도 상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밝혔다.

Q. 선별과정이 쉽지 않을 듯하다.

- 심사를 하다보면 참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가난해서 죄를 짓게 된 경우가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돈을 어떻게 갚을지 걱정되는 경우도 많다. 대출을 신청하는 분들은 대부분 자기 수중에 200만~300만원이 없고, 가족 친지들에게 돈을 빌릴 수도 없는 분들이다. 그만큼 사회적 관계망이 열악한 것이다. 깊은 병에 든 분들도 많다. 그럼에도 상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 장발장은행은 1월 5일 기준, 총 906명의 시민에게 15억9170만원을 대출해줬다. 대출자 중 500명이 상환 중에 있으며, 전액상환은 174명에 달한다. 상환액은 현재까지 4억6481만9701원에 달한다.

재원은 오로지 시민들의 후원으로 조성된다. 역시 1월 5일 기준으로 9694명의 개인, 단체, 교회로부터 총 12억2929만8980원이 모였다. 후원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Q. 재난은 취약계층을 더욱 어렵게 한다. 코로나19 사태 속 대출문의가 늘었나?

- 실제로 요청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보통 신청자의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인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일거리 자체가 없어지고 있어 전혀 벌이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지표만 봐도 알 수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동향조사 자료를 보면 2/4분기 상위 20%는 월평균 소득의 4%만 줄어든 반면, 하위 20%는 무려 18%나 줄었다. 3/4분기에도 하위 20%는 월평균 소득이 줄고, 상위 20%는 조금이나마 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저소득층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Q.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하는 이들을 위해 일수벌금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벌금을 내지못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2017년까지 4만명이 넘었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8년에는 3만 5천명으로 줄었는데, 이는 500만원 이하 벌금형에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도록 한 일명 ‘벌금제 개혁법안’이 시행에 들어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정법 시행 이후 생각보다 많이 줄지는 않았다. 아마 재판부에서 벌금형 집행유예를 잘 적용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일수벌금제' 도입이다. 빈부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같은 벌금을 부과하는 현행 총액벌금제 대신 일수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 일수벌금제란 하루 수입을 단위로 벌금을 설정하는 제도로, 잘못의 일수를 정하고 수형자의 재산·소득을 곱해 벌금액수를 매긴다.

일수벌금제는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적용하고 있다. 핀란드 기업 노키아의 휴대전화부문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60㎞ 속도제한인 도로에서 시속 80㎞로 달리다가 단속에 걸린 적이 있다. 그가 낸 벌금은 무려 11만6천유로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1억5000만원이다. 한국은 재벌 2세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건 같은 금액의 벌금을 내는 것과 상반된다. 

관련 부처에서는 일수벌금제의 반대논리로 소득·재산을 명확히 책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고 있다.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다.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로밖에 안 보인다. 

Q. 장발장은행이 올해로 출범 6주년을 맞았다. 눈에 띄는 성과를 소개해주신다면?

- 지난해 2월, 경찰청과 저소득층이나 청소년이 경미한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경우, 비범죄화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업무협약을 맺었다. 장발장은행을 통해 많은 이들이 교도소를 가지 않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다는 점에서 뿌듯하다. 

△ 지난해 2월 25일, 장발장은행은 경찰청과 ‘국민 중심 회복적 사법 실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두 기관은 △장발장은행의 지원내용과 경미범죄심사위원회․선도심사위원회 제도 홍보 △경미․소년범죄 관련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적 조력 방안 협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 대한 의견 교환 △경미범죄심사위원회․선도심사위원회 활성화를 위한 의견 교환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민갑룡(왼쪽) 경찰청장과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지난해 2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업무협약을 맺은 뒤 악수하고 있다./출처=경찰청
민갑룡(왼쪽) 경찰청장과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지난해 2월 2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업무협약을 맺은 뒤 악수하고 있다./출처=경찰청

Q. 무전유죄(無錢有罪)에서 유를 이끌 유(誘)자로 바꿔 ‘사회가 가난한 자가 죄를 짓게끔 만든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 결핍상태가 지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해결할 방법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라고 본다. 장발장은행에 대출신청하는 사례를 보면서 ‘만약 이분들에게 3년 전부터 매달 30만원씩 주어졌다면?’하고 생각한다. 기본소득만 주어졌어도 가난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당연한 권리다.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도 있다. 실현 역시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2018년 기준 11.1%)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2018년 기준 20.1%)까지만 끌어올려도 기존 사회복지 수준을 유지한 채로 월 30만원 기본소득이 가능하다. 전국민에게 1인당 매달 30만원을 지급하려면 180조원이 들어간다. 이는 2018년 기준 GDP 1898조원의 약 9.5%다. 1인당 GDP 10% 수준의 전국민 기본소득이 가능한 셈이다.

Q. 한국의 복지제도는 약자들에게 안전망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나?

- 물론 기초생활보장제도, 의료보험, 그리고, 의무교육 등 과거에 비해 복지시스템이 많이 개선된 건 맞다. 하지만 아직 많이 미비하다.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의 고질병 부의 양극화 문제는 여전히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조세제도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OECD에서 꼴찌수준이다. 재분배 전 지니계수는 유럽의 웬만한 나라보다 낮다. 하지만 재분배 이후 지니계수는 한국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재분배를 통한 사회보장이 매우 취약하다는 걸 의미한다. 

Q.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은 어떠한가. 

- 난민과 재소자의 인권이 그 사회 인권 수준의 가늠자다. 한국은 처참한 수준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물신주의(物神主義) 가치관’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인격·인품이 관심대상이 아니고 소유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현 정부만 봐도 그렇다. 위정자들 대부분이 다주택자지 않나.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병리적인 상황이라고 본다. 

이주노동자나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GDP 인종주의’가 드러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은 아래로 깔보고, 그들의 인권은 아주 가볍게 여긴다. 반면 미국·유럽의 백인들에겐 받는 것없이 한없이 올려다 본다. 

재소자들의 경우,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 처우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죄를 지었으면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다. 두 계층의 인권상황을 보면, 아직 한국사회의 인권의식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Q. 향후 계획은.

- 우선 장발장은행의 목표는 폐점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는 일이 사라지는 날 문을 닫을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회원으로서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노력을 이어갈 계획이다. 아울러 사회를 바꾸기 위한 칼럼 게재, 저술활동, 발언 등을 활발하게 할 것이다. 사회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덜기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해나가겠다. 

장발장은행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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